계급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을 바꿨을 뿐이다.

착취라는 단어가 낡은 것이 된 자리에 포트폴리오가 들어왔다. 지주와 소작농의 언어는 퇴장했고, 파이프라인과 패시브 인컴의 언어가 등장했다. 달라진 것은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오늘의 계급은 착취하지 않는다. 설계한다. 그리고 설계한 사람은 존경받는다.

이 전환이 결정적이다. 도덕적 분노가 붙을 자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뺏는 자에게는 분노할 수 있지만 잘 설계한 자에게는 분노하기 어렵다. 오히려 배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비판이 욕망으로 전환되는 순간, 구조는 안전해진다.

신화는 그렇게 작동한다. 성공한 소수를 전시하고, 실패한 다수를 지운다. 전시된 소수는 콘텐츠가 되고 강연이 되고 책이 된다. 그들의 서사는 항상 개인의 통찰과 노력으로 쓰인다. 종잣돈은 각주에도 없고, 타이밍은 언급되지 않으며, 운은 겸손의 수사로만 등장한다. 신화는 반증되지 않는다. 성공이 계속 갱신되기 때문이다. 실패는 조용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기득권 진입이 생존 목표가 된 사회에서, 그렇지 않은 삶은 두 가지 방식으로 처리된다. 비가시화되거나, 비아냥거려지거나. 비아냥은 잔인한 형식이다. 외면도 아니고 공감도 아닌, 인식하되 책임지지 않는 방식. 당사자들도 이 언어를 빌린다. 자신의 고통을 직접 말하는 대신 비틀어 말한다. 자조가 문화가 되면 연대는 불가능해진다. 같은 처지라는 인식이 공동의 분노 대신 공동의 조롱으로 귀결된다.

자신의 가치를 찾지 못한 사람은 외부에서 흡수한다. 숏폼이 서사를 제공한다. 빠르고 강렬하고 반복적으로. 생각할 틈 없이 적이 지정된다. 정부, 이민자, 다른 성별, 다른 세대. 방향은 매번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분노는 횡적으로 흩어지고 수직적 질서는 건드려지지 않는다. 공감이란 이렇게 작동한다. 비판적 사유를 대체하면서, 구조 안으로 조용히 편입시키면서. 나는 그들보다 낫다는 감각이 굴레를 견디게 한다. 그 감각을 구조가 친절하게 제공한다.

조용히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자살보도 준칙. 숫자는 오르는데 언어는 줄었다. 고통은 집단의 것이 되지 못하고 각자의 내면에서 처리된다. 이따금 특별한 죽음만이 뉴스가 된다. 그 특별함의 기준은 생전의 지위다. 높은 곳에 있던 사람의 추락만이 서사가 된다. 그 서사조차 신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소비된다. 저 자리까지 간 사람도 버티지 못했다는 비극이 아니라, 저 자리가 그만큼 치열한 곳이라는 증거로. 죽음이 계급 서사의 부품이 된다. 나머지는 통계가 된다. 통계는 슬프지 않다.

자신은 죽어도 쓸모없다는 의식. 이것을 개인의 병리라고 부르는 것은 틀렸다. 구조가 생산하는 감각이다. 쓸모의 기준이 유통 가능성일 때, 유통되지 못하는 삶은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

쓸모. 이 사회가 가장 자주 묻는 것이 그것이다. 수익화할 수 있느냐, 콘텐츠가 될 수 있느냐, 시장에서 값이 매겨지느냐. 통찰도 유통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비판도 브랜딩되지 않으면 허공에 흩어진다. 구조를 꿰뚫어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시선을 팔아야 한다. 팔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한다. 인정받지 못하면 비가시화된다.

구조를 비판하는 사람이 그 구조에 의해 지워지는 것.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항을 유통시키지 않음으로써 저항이 저항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이 체제의 가장 정교한 부분이다.

계급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부러워하는 법을 배웠다.

1. 플랫폼이 만드는 도덕의 구조적 왜곡

소셜 미디어에서 도덕적 발언은 근본적으로 가시성 경제 안에서 작동한다. 좋아요, 리트윗, 조회수 — 이 숫자들은 발언의 윤리적 타당성과 무관하게 도덕적 주장의 생존 여부를 결정한다.

여기서 역설이 발생한다. 도덕이 관심(attention)을 통해 증폭되는 구조에서, 도덕적 발언자는 옳은 말을 하는 것과 옳은 말처럼 보이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는다. 플랫폼의 알고리즘은 후자를 선호한다. 분노는 공감보다 더 잘 퍼진다.

이 구조 안에서 도덕은 신호(signal)로서의 기능을 갖게 된다. 버틀러(Judith Butler)적 의미의 수행성(performativity) — 반복적 발화가 현실을 구성하는 — 이 도덕 영역에 침투한 결과, 도덕적 행위의 중심이 효과에서 표현으로 이동한다.


2. 도덕 감정의 탈맥락화

인터넷 소셜에서 도덕적 분노는 대개 사건으로부터 탈구된 감정이다. 어떤 사건이 바이럴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원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상징적 전쟁터로 편입된다. 분노하는 사람의 상당수는 당사자도, 목격자도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왜곡의 문제가 아니다. 도덕 감정은 원래 관계적이다 — 누군가의 고통을 눈앞에서 목격하거나, 공동체 내에서 위반이 발생할 때 촉발된다. 그런데 소셜 미디어는 이 감정을 익명의 분중(分衆)에게 대량 복제한다. 복제된 분노는 원본의 도덕적 촉매를 잃고, 집단적 정체성 확인의 의례로 기능하게 된다.

이것이 소셜에서의 도덕이 종종 실제 변화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다. 현실에서 도덕적 압력은 관계망 안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작동하는데, 소셜 미디어의 도덕 논쟁은 대부분 하루 이틀 안에 소멸한다.


3. 도덕적 주체의 분산과 무책임성

전통적인 도덕 주체는 지속하는 자아를 전제한다. 칸트적 의미에서든, 공동체주의적 의미에서든, 도덕적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동일한 주체로서 시간을 가로질러 존재한다.

소셜 미디어는 이 주체를 이상하게 희석시킨다. 계정이라는 형식은 자아의 연속성을 보장하지만, 실제로는 극도로 단편화된 퍼포먼스의 집합이다. 사람들은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도덕적 입장을 취하고, 과거의 발언은 선택적으로 기억되거나 잊힌다.

더 중요한 것은 집단적 도덕 행위에서의 개인 책임 희석이다. 해시태그 운동, 집단 신고, 공개 망신 주기 — 이런 행위는 수천 명이 참여하기 때문에 어떤 개인도 결과에 대해 충분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도덕적 행위를 했다는 감각은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 귀속은 사라진다.


4. 도덕의 도구화: 무기로서의 윤리

아마 가장 냉소적인 층위는 이것이다. 소셜 미디어에서 도덕적 언어는 종종 집단 간 경쟁의 무기로 기능한다. 어떤 발언이 도덕적으로 타당한가의 문제보다, 누가 도덕적 우위를 점하느냐의 권력 게임이 더 근본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분석한 것 — 도덕이 약자의 강자에 대한 원한(ressentiment)을 합리화하는 언어일 수 있다는 통찰 — 이 인터넷 소셜에서 새로운 형태로 재현된다. 단, 이제는 강자/약자의 구도가 훨씬 복잡하고, 도덕적 우위가 실시간으로 경매에 부쳐진다.

"취소 문화(cancel culture)"가 그 전형이다. 도덕적 위반자를 공개 처단하는 행위가 실제 피해 회복이나 관계 복원을 목표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집단의 경계를 확인하고, 순응을 강제하며, 도덕적 자원을 독점하는 과정이다.


5. 그럼에도 — 무위가 완전한 무효를 의미하는가?

반론도 있다. 소셜 미디어의 도덕적 행동이 순수 퍼포먼스라면, 왜 어떤 운동들은 실제로 세상을 바꾸었는가? #MeToo는 법적 변화와 산업적 구조 변화를 이끌었다. 일부 국가에서 소셜 미디어의 도덕적 압력은 정치적 책임을 실제로 추궁하기도 했다.

가능한 해석: 도덕의 소셜화가 무위를 만드는 게 아니라, 도덕의 작동 방식 자체를 변형시킨 것이다. 관계망 내의 반복적 압력이 아니라, 임계질량을 넘어선 순간의 폭발적 효과라는 새로운 메커니즘. 이 메커니즘은 기존 도덕철학의 범주로는 잘 포착되지 않는다.

배경: 언론이 만든 담론, 그리고 우리가 놓친 것

학교폭력에 대한 사회적 분노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표면적으로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정의 실현의 욕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학교가 제공해야 할 사회적 역할의 실패에 대한 집단적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이 더 이상 안전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으며, 그 불안은 분노로 표출된다.

흥미로운 점은 학교폭력이 본격적으로 법률 영역으로 확대된 계기가 연예인들의 과거 폭력 전력 폭로였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선망하는 연예인이 학교폭력 전과가 있다는 사실을 언론이 기사화하면서 대중의 주목을 끌었고, 이는 급격한 사회적 담론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언론의 생존 전략이 기사에 투영된 것일 뿐이다. 최근의 보도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감행되는 폭로 행위는, 이미 그것이 주는 수익이 윤리적 비용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리는 연예인에게 어떤 정체성을 위탁하고는 한다. 그들이 완벽하기를, 도덕적이기를,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이상적 인간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연예인은 연예인일 뿐이다. 문제는 학교폭력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과거로 환원시키고, 그것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정작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왜 폭력을 생산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사라진다는 점이다.

1. 학교가 잃어버린 두 가지 역할

학교는 본질적으로 교육의 장이고, 생활의 장이다. 그러나 두 가지 역할 모두 실패하였다. 겉으로는 교육에 치중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학교가 제공한 것은 시험을 위한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학교가 그걸 바랐다기보다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사교육 시장을 보아라. 학부모들은 수능을 과거제처럼 사회 진입문으로 바라본다. 대학의 역할이 과연 등용문이어야 하는가?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그렇다.

점차 시대가 지나면서 사회보다 개인에게 부여된 선택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학부모에게 부여된 선택의 폭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전에는 정보가 한정되었다.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정보를 교류하거나 일부 고소득층이 전문가에게 위탁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로 양육에 대한 정보와 입시에 대한 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유튜브에는 "서울대 ○○ 엄마의 입시 전략" 류의 영상이 넘치고, 학부모 카페에는 새벽까지 입시 분석글이 올라온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어떻게 최고의 지위를 얻게 만들 수 있는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자신의 양육자로서의 가치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정보 전달의 효율성이 마케팅을 극대화시켰고, 시대 기류에 따르지 못한 학부모는 스스로 미달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매체들은 다양한 프레임으로 이를 강화한다. 자식이 불우한 환경에 놓이게 하는 건 바로 부모 탓이라는 식의, 그런 불구자식을 낳은 부모 탓이라는 식의 담론들이 만연해 있다.

그 결과 학부모에게 학교는 입시 컨설턴트와 같은 전문화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공간이 되었다. 동시에 생활 공간으로서의 가치 제공은 미묘하게 틀어진 방향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 아이가 왜 왕따가 되도록 방치했죠?" "우리 아이가 폭력을 당하는데 여태까지 조치를 안 하고 뭐했나요?" 그 모든 책임은 학교에게, 담임 교사에게 전가된다. 학교는 입시 역할에서는 가치를 부정당하면서, 생활 역할에서는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이 이중 잣대가 학교를 무력화시킨다.

사회가 주는 가치, 즉 학교에서 주는 가치가 축소되고 왜곡되면서, 학교라는 공간에 교육적인 역할도 사회적인 역할도 기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학교는 그저 가야만 하니 가는 곳으로 전락했다.

2. 의미를 잃은 공동체와 파벌화의 메커니즘

학교에서 의미를 찾기 점점 더 어려워졌고, 의미를 잃은 공동체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제 학생들에게 사회적 이익은 무엇인가? 집단 내에서 상위 위계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인가? 약자를 향한 무시와 괴롭힘이다. 의미를 잃은 공동체에서는 필연적으로 권력과 소외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모든 집단에는 원래 그럴듯한 위계가 존재했다. 그러나 반에서의 단합이 "개인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효율 중심의 사고가 확산되면서 이상한 양상을 띄게 되었다. 반에서의 단합은 단순히 집단 간의 경쟁으로써만 역할하는 게 아니었다. 반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획일화하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폭력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우리 반 친구를 건들면 가만 안 둔다" 식의 유대는 조금이나마 존재했다.

그러나 반이라는 가치가 상실되고, 결속이 약해지고, 개인화되면서 학생들은 그룹으로 쪼개지게 되었다. 나는 반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흐릿해졌다. 모두가 남이고 잠재적 경쟁 상대가 되었다. 그러면 어떤 파벌은 다른 파벌을 짓밟으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사회적 위치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대놓고 드러내서는 안 된다.

3. 법의 도입과 폭력의 비가시화

법률 체계를 학교에 도입하도록 장려됨으로써 보이는 학교 폭력은 줄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성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무시를 만들어냈다. 직접적인 괴롭힘보다 무서운 게 이 소외다. 애초에 교류라는 것이 성립되는 기회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물리적 폭력은 법으로 막을 수 있지만, 침묵과 무관심은 막을 수 없다. 법적 처벌을 피하기 위해 폭력은 더욱 교묘해지고, 더욱 보이지 않게 작동한다.

소외된 학생은 자책한다. 이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왜냐면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단순히 환경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통로에서 분노를 배출한다. 가해자를 생성한다. 외부 정보에서 가해자로 드러난 이들을 익명 속에서 공격한다. 그리고 사회 전체에 대한 증오를 갖게 된다. 잠재적인 불씨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라게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소외당한 아이가 인터넷에서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는 익명 공격자가 되고, 사회는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면서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고, 다음 세대가 또 같은 구조에 갇힌다. 이것이 바로 학교 폭력이 보이지 않게 확대되는 메커니즘이다.

결론: 우리가 재생산하는 구조

하지만 우리는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데 익숙하다. "걔네가 그렇게 눈치 없게 굴어서 그렇게 되겠지" 식의 사고는 각종 콘텐츠들을 보면 이미 만연하다. 학교에서는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다. 모두 잠재적으로 합의한다. 그 결과 더욱 소외된 자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다들 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조를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 구조 속에서 생존을 담보하기 위해. 생존은 구조에서 도망간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구조 속에서 싸워서 승리해야만 쟁취할 수 있다. 이것이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학교폭력 담론은 개인의 과거를 심판하는 데 집중하지만, 정작 그 폭력을 생산하는 구조는 여전히 작동 중이다. 학부모의 불안, 학교의 무력화, 공동체의 해체, 법의 역설, 소외된 자의 분노. 이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같은 교실을 물려주고 있다. 보이지 않는 교실에서 자라는 불씨를, 우리는 여전히 보지 못하고 있다.

개요: 안전과 자유 사이에서

최근 학교 폭력과 아동 학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교실 내 CCTV 설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신중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교실이라는 공간이 단순히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아니라, 아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생활 공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교실에 CCTV를 설치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집 안에 카메라를 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학생들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때로는 방과 후 활동까지 포함하면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학교에서 보낸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웃고, 다투고, 화해하고, 실수하고, 성장한다. 이러한 사적인 성장의 순간들을 24시간 카메라 렌즈 아래 두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우리 사회는 이미 한 번의 실수로 사람을 절벽 끝으로 내모는 경향이 있다. 성인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이 감시의 시선을 성장기 아이들에게까지 들이대야 할 이유가 있을까?

피해자 중심주의의 함정

학교 폭력이나 아동 학대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 사회는 피해자에게 깊이 공감하고 그들을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다. 피해자는 마땅히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들의 고통은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든 정책과 논리를 오직 피해자의 관점에만 맞추려는 시도는 문제가 있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받은 설움과 고통을 법적 대응과 가해자의 처단으로 해소하려 한다. 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사회 전체의 시스템을 이 프레임 안에만 가두어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는 특히 효율성을 중시한다. 그리고 범죄 기록이나 가해자라는 꼬리표가 개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피해자-가해자 구도를 명확히 만들어내는 것은 앙갚음이나 정의 구현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CCTV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력적인 도구가 된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증거를 수집하는 용도로는 CCTV만큼 효율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영상 하나면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명확해진다. 법정에서도, 여론에서도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CCTV는 사후 대응에는 탁월하지만, 예방에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CCTV가 학교 폭력이나 아동 학대를 줄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카메라가 있으니 조심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하지만 현재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실상은 다르다. 학교 폭력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으며, 오히려 카메라의 사각지대에서 더욱 교묘하고 은밀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CCTV가 만드는 새로운 사각지대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화장실에서 괴롭힘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화장실에는 당연히 CCTV가 없다.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장실에서 벌어진 폭력은 증거가 남지 않는다. 복도나 교실에 아무리 많은 카메라를 설치해도, 가해자들은 단순히 화장실이나 건물 뒤편, 학교 밖 골목처럼 카메라가 없는 곳으로 장소를 옮길 뿐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화장실에도 CCTV를 설치하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그건 또 다른 인권 침해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CCTV의 근본적인 한계다. 카메라는 가시적인 공간만 감시할 수 있고, 인간의 악의나 폭력성 자체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폭력을 더 은밀하게, 더 교묘하게 만들 뿐이다. SNS를 통한 사이버 불링, 교묘한 언어 폭력, 집단 따돌림 같은 것들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진짜 필요한 것은 감시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대응이다. 학생들이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교사가 학생들과 신뢰 관계를 쌓으며, 문제가 생겼을 때 즉각 개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말이다.

그런데 현재 교육 현장의 상황은 어떤가? 교사들은 학생을 지도하는 것보다 학부모의 민원과 항의에 대응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지난해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들을 우리는 모두 기억한다. 교사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그 무게를 우리는 안다. 이런 상황에서 교실에 CCTV를 설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교사에게 또 하나의 감시 장치를 들이대는 것이며, 학생과 교사 사이의 신뢰를 더욱 약화시키는 조치다. 교사는 교육자가 아니라 카메라에 찍힐 행동만을 조심하는 감시 대상이 되고, 학생들 역시 자신의 모든 행동이 기록된다는 사실에 위축될 수밖에 없다.

감시 사회의 위험성

CCTV 설치를 둘러싼 논의에서 자주 간과되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정보 보안과 프라이버시 침해의 위험성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집에 홈캠을 설치한다. 반려동물인 고양이나 개를 보살피기 위해서, 혹은 집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홈캠들이 해킹당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최근 쿠팡 및 통신사 등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보라.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해킹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하지 않다. 홈캠 역시 마찬가지다. 해커들에게 개인의 일상이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교실의 CCTV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 "북한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이 단순한 과장이 아니다. 그 카메라의 소유권과 통제권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법적으로는 학교나 교육청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해커들이나, 심지어 국가 기관이 원하면 접근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학생들의 일상, 교사와 학생의 대화, 학생들 간의 상호작용, 이 모든 것이 디지털 데이터로 축적되고 언제든 유출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편리함과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이 위험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를 쉬운 해결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문제가 생기면 카메라를 달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올 장기적인 영향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교실은 분명 공적인 교육 공간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학생들의 생활의 터전이며, 인격이 형성되는 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실수하고, 배우고, 성장한다. 그 과정이 모두 카메라에 기록되고, 언제든 누군가에 의해 재생될 수 있다는 것이 과연 건강한 성장 환경일까?

CCTV 설치는 본질적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사무실, 학원, 백화점에 왜 CCTV가 있는가? 주인이 문제가 생겼을 때 곤란해지지 않기 위해서다.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고, 분쟁이 생겼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교실에 CCTV를 단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학교와 교육청, 정부가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고 말하기 위한 면책 장치에 가깝다. 실제로 학생들의 안전과 성장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민하기보다는, 당장 가시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비난을 피하려는 것이다.

결론: 병든 사회를 치유하는 진짜 방법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우리 사회가 너무 병들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연하다.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이며, 교육 시스템의 문제이고,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의 문제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처럼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보이는 해법을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은 답이 아니라는 점이다. CCTV 설치는 표면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깊은 곳의 문제를 은폐하고 사회를 더욱 병들게 만들 뿐이다. 감시가 늘어날수록 신뢰는 줄어든다. 학생과 교사 사이의 신뢰, 학생과 학생 사이의 신뢰, 학교와 학부모 사이의 신뢰가 무너지면, 아무리 많은 카메라를 달아도 안전한 교육 환경을 만들 수 없다.

진짜 필요한 것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교사가 학생을 제대로 지도할 수 있는 권한과 환경을 보장하고, 학생들이 실수하고 배울 수 있는 여유를 주며, 학부모와 학교가 협력할 수 있는 신뢰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학교 폭력에 대해서도 처벌과 감시가 아니라 교육과 회복적 정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런 변화는 CCTV 설치보다 훨씬 어렵고 오래 걸린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정으로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당장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감시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신뢰와 교육을 통한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할 것인가. 전자는 쉽지만 우리를 더욱 병든 사회로 이끌 것이고, 후자는 어렵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안전하고 자유로운 성장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정부主導 태양광 사업이 남긴 교훈

몇 해 전 한국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해 태양광 패널을 전국에 도입하며 녹색 혁명을 약속했다. “재생에너지 3020” 계획 아래 2030년까지 전력의 20%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하겠다는 거대한 정량 목표가 세워졌고, 보조금 지원과 설치 장려 정책이 쏟아졌다. 초기에는 눈에 띄는 성과도 있었다. 2018년부터 2019년 중반까지 1년 반 동안에만 4.5GW 이상의 재생에너지 설비가 보급되는 등 목표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듯했다 [1]. 그러나 “양을 늘리는” 데 집중한 태양광 드라이브의 이면은 시간이 지나며 드러났다. 학계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재생에너지 정책은 잦은 정책 변경, 미흡한 지원 설계, 정부 부처 간 조율 부족, 부실한 모니터링 등으로 추진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고, 최종 에너지에서 재생에너지 비중도 유사 경제수준 국가들에 비해 크게 뒤처졌다 [2]. 이는 급한 정권 성과에 몰두한 나머지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이 떨어졌음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태양광 산업의 혁신 경쟁력 부재가 큰 교훈이다. 정부 주도로 설치량을 밀어올린 사이, 국내 산업의 기술 역량 강화는 뒷전이었다. 그 결과 국내 태양광 공급망은 외국 의존도가 심화되었다. 실제로 5년 전만 해도 50%를 넘었던 국산 태양광 셀 시장점유율이 2024년에 사상 최초 한 자릿수(4%)로 추락했고, 같은 해 중국산 셀은 한국 시장의 95% 이상을 점령했다 [3]. 값싼 중국산 모듈 공세에 국내 기업들이 밀린 데 이어, 기술집약적 핵심 부품인 셀마저 중국에 장악당한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모듈 시장을 내준 건 가격 탓이지만 셀마저 내준 건 기술력에서도 밀렸기 때문”이라며 산업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정부 보조금에 기대어 양적 보급에 치중한 정책은 국내 기업의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보조금이 줄어들자 산업은 급속히 위축되고 말았다. 전문가들도 “온실가스 목표 달성에만 매달리느라 질보다 양에 집착한 것이 패착”이라 지적하며, 문재인 정부 시절 보급 일변도 정책이 중국 업체들의 시장 장악을 가속화했다고 평가한다. 정부 지원에 의존한 거품이 빠지자 2024년 국내 태양광 기업 95%가 시장 상황이 전년보다 악화됐다고 느낀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4]. 태양광 사례는 보여준다 – 단기 성과에 급급한 양적 지표 중심 정책은 지속가능한 혁신 생태계를 만들지 못하며, 오히려 외부 의존과 부실을 키울 위험이 있다는 것을.


2025년 AI 인재 양성 사업의 Déjà Vu

이제 같은 오류가 인공지능(AI) 정책에서 되풀이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국 정부는 ‘디지털 인재 100만 양성’을 국정과제로 내걸고, 2025년 현재 대대적인 AI 인재 양성 사업을 추진 중이다. 교육부 발표에 따르면 내년 한 해에만 AI 인재 교육에 1조 4천억 원을 투입하여 초중등 코딩·AI 교육 의무화, 대학 정원 확대, 성인 재교육 등 전 사회적으로 AI 인력 저변을 넓히겠다는 청사진이 제시됐다 [5] [6]. 겉보기에는 전국민의 AI 역량을 끌어올리는 포부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모두를 위한 AI 교육” 구상이 과연 진정한 AI 인재를 길러낼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7] [8].

돌이켜보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부는 “코딩 교육 열풍”을 주도하다가, 정권이 바뀌자 이제는 코딩을 뒷전으로 하고 AI 실무 인력 양성에 초점을 옮겼다. 3~4년 주기의 정책 사이클 속에서 교육 방향이 급변하는 현상은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목표가 바뀌는 것 자체보다, 이런 단기적 방향 선회로 인해 정책 일관성과 교육 생태계가 흔들린다는 점이다. 일례로, 지난 정부가 초·중·고 코딩 의무교육을 도입해 사설학원 붐까지 일었지만 현 정부 들어 상대적으로 관심이 줄었고, 대신 AI 인재 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예산과 프로그램들이 쏟아지는 상황이다. 이는 마치 유행을 좇듯 행정적 성과를 빨리 내기 위해 교육 정책의 방향키를 급히 틀어버리는 관행으로, 장기적인 생태계 구축보다는 당장의 숫자 성과에 집중하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현재 추진 중인 AI 인재 양성 사업의 구조적 한계로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은 “양적 목표 우선, 질적 성과 뒷전”이라는 점이다. 정부는 취약계층부터 비전공 직장인까지 “폭넓은 대상에게 고르게 지원”하겠다며 예산을 분산 투입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AI 경쟁력은 소수의 핵심 전문 인력에게 좌우된다. 세계적인 AI 기업이나 연구기관을 움직이는 인재는 불과 수백 명 규모에 지나지 않는다. 엔비디아, 오픈AI, 메타 등 글로벌 AI 선도 기업들이 보유한 최고급 AI 전문가 집단이 그 예다. “AI 인재는 6개월 단기 과정으로 탄생하지 않는다”는 지적처럼, 진정한 전문가란 오랜 연구와 산업 현장 경험 속에서 길러지는 법이다. OECD 조사 역시 각국의 AI 인력 중 60% 이상이 석·박사 학위를 갖춘 고학력 고숙련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초급 교육을 수백만 명에게 시킨다고 해서 그 중 세계적 수준의 AI 인재가 양산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단기간에 수많은 ‘AI 수료자’를 찍어내는 현재 방식으로는 국제 경쟁에서 통할 만한 질적 인재 풀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온다 [7] [8].

산학 연계와 현장 통합의 부족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AI 인재는 교실이 아니라 기업 연구실과 현업 문제 속에서 성장하는데, 한국의 인재 양성 정책은 여전히 정부 주도의 프로그램 공모와 예산 집행, 그리고 행정적 성과 관리에 치우쳐 있다 [7] [8]. 한 마디로 “프로그램 중심 → 예산 분배 → 행정 성과 측정”이라는 공무원식 KPI 틀에 갇혀 있다는 평가다. 기업과 대학이 자율적으로 협력하여 산업 수요에 맞는 인재를 기르는 생태계보다는, 정부가 주도한 단기 교육과정 수료 인원을 성과 지표로 삼는 구조라는 지적이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 정작 필요한 최고급 연구 인력이나 창의적 개발자는 턱없이 부족하고, 기업들은 “뽑을 사람이 없다”는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역량 있는 젊은 인재들은 글로벌 빅테크나 해외 대학으로 빠져나가는 추세다. 2024년 기준 한국의 AI 인재 순유입 지수는 인구 10만 명당 -0.36명으로, 주요국 중 최하위 수준의 순유출국으로 전락했다. 한국 AI 산업 인력의 약 16%가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낮은 임금과 제한된 연구 환경 탓에 “이런 대접 받으며 굳이 한국 갈 이유가 없다”며 떠나는 것이다. 결국 정부가 양적으로 길러낸 인재가 정작 국내에는 남아있지 않는 아이러니까지 나타나고 있다 [9]. 이렇게 산업과 유리된 채 숫자에 치중한 인재 정책은 지속가능한 혁신으로 이어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숫자에서 실력으로: 혁신 정책의 새로운 길

태양광 정책의 실패담과 현재의 AI 인재 양성 사업이 보여주는 공통된 교훈은 분명하다. 혁신은 단순한 숫자 놀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정부 주도의 단기 성과 몰이는 종종 보여주기식 행정 쇼로 끝날 뿐, 산업의 내실을 다지지 못한다. 이제는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의미 있는 혁신 정책은 눈에 보이는 지표보다 보이지 않는 토대를 구축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첫째, 숫자 성과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발전용량 몇 GW, 인재 몇만 명 식의 지표는 정치적 홍보에는 유용할지 모르나, 정작 중요한 품질을 담보하지 못한다. 앞으로는 정책 목표를 정량적 지표 달성이 아닌 질적 역량 제고에 두어야 한다. 예컨대 AI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논문 배출, 글로벌 경쟁력 있는 스타트업 창출, 국내 기업의 기술 자립도 향상 등이 보다 본질적인 성과 지표가 될 것이다.

둘째, 중앙집권적 정책에서 분권형 혁신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동안 모든 것을 정부 부처 주도로 기획·집행하고 일률적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은 현장의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했다. 이제는 대학, 기업, 지역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각자의 강점을 살리는 분산된 혁신 모델을 장려해야 한다. 정부는 기본 인프라와 규제 완화, 장기 자금 등을 통해 환경을 조성하고, 실제 인재의 육성과 기술 개발은 산업계와 학계가 이끌도록 해야 한다 [8]
셋째, 단기 프로젝트 위주의 지원금을 지양하고 장기적 안목의 투자로 전환해야 한다. 혁신 기술과 인재는 1~2년 지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실패하더라도 꾸준히 재도전할 수 있게 5년, 10년을 내다본 연구비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AI 같이 첨단 분야는 슈퍼컴퓨터 인프라, 데이터셋, R&D 자금 등 기반 투자를 지속해주는 것이 인력 양성에는 단기 교육비 지원보다 효과적이다. 세계적 수준의 AI 인재 100명을 키우는 데 집중 투자한다면, 이들이 파생적으로 수천, 수만의 종사자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8].

넷째, 교육-산업 연결고리를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현재 많은 청년이 AI를 배우지만, 정작 산업계에서는 실무역량 격차로 채용을 망설이거나, 우수 인재는 해외로 떠나는 괴리가 크다. 이를 해소하려면 대학 교육 과정에 최신 산업 수요를 반영하고 현장 실습, 인턴십, 산학 프로젝트를 통해 졸업생들이 곧바로 활용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민간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인재 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도록 세제 혜택 등을 주어, 평생학습과 커리어 발전의 선순환을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AI 석·박사 인력들이 안정적으로 연구에 매진할 일자리 창출과 연구자에 대한 처우 개선도 병행되어야 한다 [10].

마지막으로, 정치적 시간표에 얽매이지 않는 초정권적 혁신 전략이 요구된다. 과학기술 인재 양성과 산업 혁신은 한두 해에 가시적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방향을 흔들기보다 일관성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10년, 20년 뒤를 내다보고 초석을 놓는 정책이야말로 진짜 지혜로운 선택이다. 세계 최고를 지향하며 성장통을 견디는 긴 호흡의 투자가 없다면, 우리는 또다시 수치상 목표는 채웠지만 실속은 남지 않는 실수를 반복할지 모른다. 대한민국이 태양광의 전철을 밟지 않고 AI 시대의 진정한 승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제 양(量)의 함정에서 벗어나 질(質)의 담론으로 넘어와야 한다. 단기적인 정치 쇼보다는 장기적인 혁신 역량 축적을 중시하는 담대한 정책 전환이 절실하다. 눈에 보이는 패널의 개수나 교육 인원 수보다, 보이지 않는 경쟁력과 창의성이 꽃필 토양을 가꾸는 일에 집중할 때다. 숫자가 아닌 실력으로 말하는 나라, 바로 그런 환경에서만 미래 산업을 이끌 진짜 인재와 기술이 자라날 것이다.


참고문헌

[1] 재생에너지 3020 이행실적 점검결과
https://www.energ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540

[2] Why is South Korea's renewable energy policy failing?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282557369_Why_is_South_Korea's_renewable_energy_policy_failing_A_qualitative_evaluation

[3] “중국에 시장 다 내줬다” — 디이코노미
https://kr.economy.ac/news/2025/10/202510280985

[4] 태양광업체 95% 악화 기사
https://www.ske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39476

[5] 공교육 대전환 100만 디지털 인재
https://www.munhwa.com/article/11393686

[6] AI 인재 양성 1.4조
https://biz.chosun.com/policy/policy_sub/2025/11/10/U6GJI4JNQFF67KIUEOGNQJBNO4/

[7] 브런치 정책분석 1
https://brunch.co.kr/@@2Ym1/119

[8] 브런치 정책분석 2 (12

23,25

28 묶음)
https://brunch.co.kr/@daeheestory/119

[9] AI 인재 유출 기사
https://www.mk.co.kr/news/business/11447548

[10] 임금 프리미엄 기사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233066.html

부동산 통계: 출처 한국일보

개요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이제 단순한 시장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불평등 구조를 고착화시키는 핵심 요인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상위 20%와 하위 20% 계층의 부동산 자산 격차가 무려 130배를 넘어섰다고 한다. 이 수치는 단순한 통계 이상이며, 한국 사회가 이미 위험할 만큼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서 있음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 정책은 좀처럼 실행되지 않는다. 이 글은 왜 우리가 “역대 최악의 불평등”을 알면서도 아무런 구조적 변화를 만들지 못하는지를 살펴보고, 주거 정책이 실질적 변화를 가로막는 요소들을 분석한다.


1. 공공의 개입이 필요한 이유와 그 단순함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자본이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 흐르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경제 성장률은 둔화되고 새로운 산업은 충분한 투자처로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개인들은 안전한 자산을 찾기 위해 주택에 자본을 집중시킨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집은 생활의 기반이 아니라 '가장 안전한 금융 상품'으로 인식된다. 이로 인해 시장은 지속적으로 과열되고, 가격은 실수요와 괴리된 방향으로 움직인다. 임대 시장 역시 안정적인 공급을 받지 못한 채 민간의 수익 논리에 맡겨지다 보니, 주거비 부담은 서민층과 청년층에게 더욱 가혹하게 작용한다.

이 과열된 시장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장기적으로 충분한 규모의 공공임대주택을 확보하는 일이다. 국가가 직접 토지를 매입하고 공급망을 관리한다면 투기적 수요는 자연스럽게 분산되고, 가격 변동성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이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검증된 정책 방향이기도 하다. 해결책은 기술적으로 복잡하지 않다. 문제는 그것을 실행할 정치적 용기와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 누구도 돈을 쓰려 하지 않는 정치 구조

공공임대 확대에는 대규모 초기 비용이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고 안정적인 주거 환경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지만, 정치적 계산 속에서는 단기적인 재정 부담이 훨씬 크게 부각된다. 정치인의 임기는 제한적이고, 그 안에서 유권자의 눈에 띄는 성과를 내야 한다. 공공임대주택 사업은 성과가 느리게 나타나며, 당장의 지출은 비판의 표적이 된다. 그 결과 정부와 지자체는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누구도 ‘먼저 돈을 쓰려 하지 않는’ 구조가 형성된다.

이러한 정치 구조는 주거 정책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서 장기적 관점이 사라지고 단기적 이해관계가 모든 결정을 좌우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결국 공공의 역할은 이론적으로만 논의될 뿐, 실제 정책으로 구현되지 못한다. 해법은 명확하지만, 그 해법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구조가 부재한 것이다.


3. 국민 정서가 만들어낸 집단적 교착 상태

부동산 자산 격차가 130배로 벌어졌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심각한 격차 사회가 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개혁은 쉽게 추진되지 않는다. 그 배경에는 국민 정서라는 복잡하면서도 강력한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 세금에 대한 불신, 공공 소비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집값 하락에 대한 두려움은 어떤 정책도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친다’는 인식을 강화한다.

한국의 가계 자산 구성은 과도하게 부동산에 집중되어 있고, 유주택자에게 집값 하락은 단순한 자산 손실이 아니라 생애 계획 전체의 붕괴로 받아들여진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개혁 정책을 반대하며, 이는 정치권이 구조적 변화를 시도하기 어렵게 만든다. 무주택자들 역시 공공임대를 원하면서도 세금 부담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결과 사회 전체는 주거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조치를 실행하기 위해 부담을 나누자고 하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한다.


결론

한국의 부동산 불평등이 ‘역대 최악’이라는 비판은 과장이 아니다. 부동산 자산 격차 130배라는 수치는 사회적 경고음에 가깝다. 그러나 이 문제는 기술적으로 복잡한 난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단순한 해법이 사회적 합의 부족이라는 벽에 가로막히고 있는 것이다. 공공임대 확대라는 명확한 해법은 정치적 부담 때문에 회피되고, 국민 정서는 그 부담을 위험으로 인식해 정책 변화를 가로막는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우리는 불평등이 악화되는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사회적 교착 상태에 갇혀 있다. 문제의 핵심은 해법의 부재가 아니라, 해법을 실행할 용기와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 있다. 한국 사회가 이 교착 상태를 넘어설 수 있을지는, 결국 공동체가 어떤 미래를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1. ‘떼쓴다’는 말이 지워버리는 것들

동덕여대 사태를 두고 바깥에서 가장 쉽게 꺼내 드는 말이 “그래봤자 떼쓰는 거다”라는 식의 표현이다. 이 한마디는 사건의 맥락을 통째로 잘라내고, 학생들을 하나의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는 미성숙한 집단으로 위치시킨다. 하지만 조금만 구조를 들여다보면, 이번 갈등은 단순한 감정 과잉이 아니라 대학의 존립 방식, 여대의 정체성, 그리고 의사결정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문제들이 겹쳐진 지점에서 터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학교가 재정 위기와 학령인구 감소를 이유로 공학 전환을 논의하는 순간, 학생들은 “학교가 우리를 하나의 이해당사자로 인정하는가, 아니면 통계상의 숫자로만 다루는가”라는 질문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여대에서 여학생으로 살아가는 몇 년의 경험은 단순히 ‘수업 듣는 시간’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형성되느냐에 따라 정체성과 관계망, 자기 인식 전체를 바꾸는 시기다. 그런 공간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논의가 책상 위에 올라왔을 때, 그 공간을 현재 사용 중인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위기 상황이다. 그 위기감에서 나오는 저항을 “떼쓴다”라는 말로 축소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이 싸우고 있던 대상—학교의 일방성, 불투명한 절차, 그리고 여대라는 공간의 의미—를 같이 지워버린다. 결국 이 표현이 날카롭게 보이기는커녕, 정작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쪽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거울에 가깝다.

2. 충분히 촉발될 만한 동기, 그리고 소진되어가는 사람들

지난해 동덕여대 사태가 발발했던 때에는 촉발 동기가 충분히, 아니 과도할 정도로 쌓여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공학 전환 논의가 밖으로 알려졌을 때, 그것은 “갑자기 발작적으로 튀어나온 감정”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된 불신 위에 올라탄 마지막 불꽃에 가까웠다. 2025년 12월 3일 동덕여대는 2029년 이후 공학으로 전환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학교 측은 공론화라는 이름으로 위원회를 만들고, 숙의기구 토론·타운홀 미팅·온라인 설문조사를 거쳤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수적으로도 가장 많은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의견 반영 비율이 교수·직원·동문과 1:1:1:1로 맞춰졌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메시지다. “너희가 제일 많이 겪겠지만, 의사결정의 무게는 똑같이 나눌 거야”라는 식의 태도는 형식적으로는 균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큰 이해당사자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희석시키는 구조다. 이런 구조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아무리 말해도 결국 위에서 정한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학습된 무력감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지난해 11월 점거·시위로 갈등이 폭발한 이후, 올해 공론화 절차와 학교 측 결정 발표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긴장을 반복해서 겪어야 했다. 이것은 해마다 다른 국면으로 이어지며 공동체의 체력을 지속적으로 소모시킨 과정이다. 그리고 지금, 공학 전환 발표가 나온 이 시점에서 학생들은 아마 복합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분명히 싸웠고, 일정 부분 논의를 지연시키고, 학교에 비용과 부담을 안겼지만, 최종 결과가 크게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 감각. “우리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허탈함과, 그래도 싸웠기 때문에 드러난 진실들이 있다는 미묘한 위안을 동시에 느끼면서, 더 싸울 힘은 남지 않은 상태로 조용히 흩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건 패배라기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 다른 층위—기억, 기록, 서사—로 이동하는 순간에 가깝다.

3. 여론과 이미지 손상, 비용은 누가 치르는가

갈등이 장기화되고 언론 보도가 반복되는 동안 동덕여대라는 이름에는 이미 하나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공학 전환 둘러싸고 시끄러운 학교’, ‘시위와 고소·고발로 뉴스에 오르내린 학교’라는 낙인은, 실제 그 안에서 조용히 공부하고 살아가던 개별 학생들에게도 그대로 따라붙는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이름은 여전히 사람의 능력과 인상을 대충 재단하는 도구로 쓰인다. 그런 사회에서 특정 학교가 사회적 논쟁의 장으로 소환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세금이 추가로 붙는 것과 같다. 취업 자리에서, 네임카드를 꺼내는 자리에서, 자소서를 쓰는 순간마다 “아, 거기 그 학교?”라는 반응이 덧붙을 가능성을 떠안게 된다. 문제는 이 이미지 손상의 비용을 실제로 치르는 쪽이 누구냐는 점이다. 공학 전환을 밀어붙인 재단 이사회도, 의사결정의 최종 버튼을 누른 사람들도, 여론을 자극적인 제목으로 소비한 언론도 아니다. 비용은 언제나 가장 약한 위치의 개별 학생들에게 먼저 떨어진다. 여론은 이 점에서 잔인하다. 사건의 구조는 복잡하게 움직이지만, 보도 방식은 단순하고 감정적이며, 검색 기록과 포털의 알고리즘은 이 이미지를 오랫동안 저장한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기사와 댓글, 짧게 편집된 클립들은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가”보다 “어떤 장면이 더 자극적이었는가”를 기준으로 확산된다. 그 결과로 남는 것은 학교라는 조직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아니라, 학생 개인에 대한 모호한 편견이다. 구조적 의사결정의 책임은 나눠지고 희미해지지만, 낙인의 무게는 구체적인 개인의 어깨 위에만 얹힌다.

4. 여대 공동체의 의미를 페미니즘 프레임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이유

이 사건을 두고 외부에서 가장 손쉽게 가져오는 프레임 중 하나는 “또 페미니즘이다”, 혹은 “여대라서 저러는 거다”라는 식의 단순화이다. 하지만 여대라는 공간을 단순히 ‘페미니즘 진영의 전초기지’로만 이해하는 것은 현실을 심각하게 축소하는 태도다. 여대가 지닌 의미는 물론 젠더 정치와 얽혀 있지만, 그것을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많은 여성들에게 여대는, 일상적인 남성 중심 문법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들의 언어와 기준으로 관계를 맺고 성장하는 장소다. 수업에서 발표를 하든, 동아리에서 활동을 하든, 학생회에서 의견을 내든, 이 모든 공간에서 ‘남자들의 반응을 먼저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심리적 자산이다. 그 안에서 형성되는 동료 의식, 롤모델, 연대 감각은 반드시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해야만 생기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쌓이는 어떤 분위기와 공기 같은 것에 가깝다. 공학 전환이 곧 악이고, 여대 유지만이 선이라는 이분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대가 사라지거나 형태를 크게 바꾸는 논의는 단순히 입시 구조와 재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지점을 무시한 채 사건 전체를 “페미니즘 갈등”이라는 프레임에 던져넣으면, 실제로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세밀한 경험과 상실이 전부 지워진다. 그리고 그 지워진 자리에는 언제나 외부의 이념 싸움만이 크게 자리 잡는다.

5. 무력감 이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어느 시점이 되면, 이번 사태에 직접 몸을 던졌던 사람들 상당수는 아마 조용히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다른 삶의 국면으로 이동할 것이다. 학교는 시간이 지나면 공학 전환을 기정사실화하고, 새로운 홍보 문구와 브랜드 전략을 짤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노도, 슬픔도, 저항도 차츰 잦아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무력감 이후에 무엇이 남느냐가 진짜 중요한 지점이다. 만약 이 사건이 “괜히 떠들어봤자 윗선이 정한 결론은 안 바뀐다”는 냉소만 남기고 끝난다면, 그것은 하나의 대학 사건을 넘어 다음 세대의 정치적 상상력 자체를 깎아먹는 결과로 이어진다. 반대로, 비록 원하는 결론을 얻지 못했더라도, 그 과정에서 드러난 구조적 문제들—의견 반영 방식, 공론화 절차의 설계, 대학 재정의 투명성, 여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계속 이야기한다면, 이 경험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다음 변화를 준비하는 밑바닥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겼냐 졌냐”가 아니라,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현실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서로를 비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같은 약자의 위치에서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지 찾는 움직임이다.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은 이제 하나의 정책 결정이자 행정 절차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교육, 젠더, 재정, 민주주의가 어떻게 엮여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케이스 스터디가 되어버렸다.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느냐, 어떤 언어로 다시 말하느냐, 누구의 시각을 중심에 놓느냐는 앞으로 비슷한 갈등이 나타났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의 폭을 달리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지 안에는, 적어도 누군가의 경험과 문제 제기를 가볍게 치부하는 표현들은 더 이상 자리 잡지 않았으면 한다.

1. 철학으로 시작하는 브랜드와 시장으로 시작하는 브랜드

일본 아웃도어 브랜드 몽벨(Montbell)은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고 차분한 브랜드다. 그 조용함은 단순히 마케팅을 덜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브랜드가 말하고 싶은 핵심만 남기고 불필요한 외침을 제거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몽벨이 유지해온 철학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가벼움, 실용성, 절제. 이 세 가지는 창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제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각 아이템은 그 철학을 실험하고 입증하는 무대처럼 기능한다. 철학이 우선이고, 제품은 그 철학을 구현하는 증거이며, 시장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구조이다.

반면 한국의 많은 패션 브랜드는 전혀 다른 순서를 요구받는다. 시장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트렌드이며, 그 마지막에야 브랜드의 철학이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이는 한국 브랜드가 철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철학보다 속도를 우선해야 하는 시장 구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판매량은 곧 생존이고, 시즌마다 매출이 흔들리면 브랜드 전체가 흔들린다. 시장은 브랜드가 철학을 설명하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철학은 ‘있어도 쓸 수 없는 것’이 되고, 속도는 ‘싫어도 따라가야 하는 것’이 된다. 이 구조는 한국 브랜드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국 산업 환경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2. 철학을 길게 축적하는 환경과 철학을 허용하지 않는 환경

몽벨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일관된 철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브랜드 자체의 결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일본의 소비 문화는 기업과 소비자가 꾸준히 관계를 쌓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브랜드가 서서히 변화하더라도 소비자는 그 과정을 함께 경험하며 신뢰를 쌓는다. 일본 내수 시장은 충분히 크고 안정적이어서, 하나의 브랜드가 장기적 실험을 반복하더라도 시장 밖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몽벨이 소재 개발과 기능적 실험을 오랫동안 반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문화적·산업적 여유 덕분이다.

한국은 이와 정반대의 환경 속에서 성장해왔다. 한국 패션 산업은 빠른 도시화, 빠른 유통 혁신, 빠른 소비 리듬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생태계다. 새로운 디자인은 빠르게 나와야 하고, 판매량은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하며, 다음 시즌을 준비할 시간조차 촉박하다. 유통 구조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 필요한 느린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브랜드가 철학을 중심에 둔다면 그것은 곧 ‘위험’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재고는 쌓이고, 유통은 브랜드를 제외하고, 소비자는 다음 브랜드로 이동한다. 한국 브랜드가 철학을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짧은 것이다.


3. 내수 중심의 기반이 철학을 보호하는 방식

몽벨은 해외 시장 진출을 하지 않았던 브랜드가 아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해외 시장에 진출했고, 오늘날 미국과 스위스 등지에 법인과 매장을 운영하며 글로벌 배송도 제공한다. 그럼에도 몽벨이 ‘일본에서 사오는 브랜드’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게 된 이유는, 해외 사업의 존재 여부와 관계없이 일본 내수 시장이 브랜드의 중심축으로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는 100개가 넘는 매장이 있고, 일본 시장이 제품 실험과 철학 구현의 주요 무대다. 해외 확장은 존재하지만, 내수 시장이야말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공간으로 남아 있다.

이 구조는 몽벨에게 독특한 균형을 만들어준다. 해외에서 판매하되, 해외의 요구에 브랜드가 흔들릴 만큼 확장하지 않는다. 글로벌 소비 시장의 빠른 트렌드 변화가 브랜드 철학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해외 사업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이는 “해외 확장을 거부했다”라는 극단적 스토리가 아니라, 확장은 하되 철학을 해칠 만큼 키우지 않는 신중한 속도 조절에 가깝다. 반대로 한국 브랜드는 내수만으로는 생존과 확장을 동시에 충족하기 어려워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글로벌 트렌드의 압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 결국 철학의 유지 여부는 브랜드의 선택이 아니라, 시장이 허용하는 선택지의 폭에서 결정된다.


4. 철학의 시대가 다시 올 수 있는가

몽벨이 보여주는 것은 ‘철학을 고집하면 성공한다’는 단순한 명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철학을 고집할 수 있을 만큼의 시장적 완충 장치가 있었는가이다. 일본의 소비 문화와 내수 시장은 그 완충 장치를 제공했고, 몽벨은 그 안에서 철학을 실험하며 서서히 단단해질 수 있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속도와 경쟁이 우선되는 구조 속에서 브랜드가 철학을 중심으로 움직일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철학이 시장을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철학이 자랄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철학 기반 브랜드가 성장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있다. 다만 그것은 단일 브랜드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소비 문화와 유통 구조가 변화해야만 한다. 소비자가 일관성과 세계관을 요구하기 시작하고, 유통이 브랜드의 장기 실험을 용인하는 구조가 마련될 때, 한국에서도 철학 중심 브랜드가 등장할 수 있다. 철학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 일관성이다. 몽벨의 사례는 철학을 중심으로 구축된 브랜드가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철학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는지도 함께 보여준다.

한국의 패션 산업이 속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철학을 품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게 된다면, 몽벨처럼 깊은 시간을 담은 브랜드가 한국에서도 자연스럽게 등장할 것이다.

 

개요: 기준 상실의 시대가 드러낸 한국式 성장 패러다임의 한계

한국 대기업은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산업 집단이자, 세계 경제사에서도 이례적인 성공 사례로 기록된다. 제조업 기반으로 시작해 반도체·전자·자동차 등 각 분야를 세계 정상급으로 끌어올렸고, 대한민국의 경제적 도약을 사실상 견인했다. 그러나 지금, 이 거대한 조직들은 성장을 멈춘 듯한 정체 상태에 놓여 있다. 내부적으로는 혁신을 외치지만, 외부에서 보이는 모습은 방어적이고 둔중하며 변화에 뒤처지고 있다. 문제는 단순한 글로벌 경기 둔화나 도전적 경쟁자의 등장 수준이 아니다. 더욱 본질적인 이유는 한국 대기업이 의존해온 기존 성장 공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데 있다.

과거의 한국 대기업은 “정답이 존재하는 시대”에 최적으로 작동했다. 벤치마킹 가능한 모델이 있었고, 기술·공정·전략의 대부분은 이미 선진국이 구축해놓았다. 기업은 그 기준을 빠르고 정교하게 모방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정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시대, 기준 자체가 사라진 시대다. 이런 환경에서 과거의 충성·속도·효율 기반 모델은 오히려 발목을 잡는 구조적 한계로 작용한다. 이 글은 이러한 구조적 전환을 분석하고, 왜 한국 대기업의 시도가 지금 실패하는지, 그리고 정답 없는 시대에는 누가 새로운 성장의 중심이 되는지를 논증한다.


1. 기준이 존재하던 시대: 한국 대기업 성장 모델의 기저에 깔린 충성·희생 기반 시스템

한국 대기업의 초고속 성장은 실력과 전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아래에는 한국 사회 특유의 동원 한계와 집단 문화가 강력한 엔진으로 작용했다. 산업화 초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이미 구체화된 기준이 존재했다. 일본의 제조 시스템, 독일의 엔지니어링 모델, 미국의 기술·경영 철학은 한국이 따라갈 수 있는 완결된 참고서였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일본을, 반도체를 만들려면 미국을, 가전을 만들려면 일본과 유럽을 따르면 됐다.
정답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강력한 성장 촉매제였다.

정답이 존재하는 시대에는 창의성보다 실행력이, 판단보다 복종이, 자율성보다 충성심이 더 효율적이다. 위계적 조직 구조는 일을 빠르게 배분했고, 장시간 노동을 견딜 수 있는 문화는 제품 생산량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야근은 애국", "회사=국가", "우리가 경제를 일으킨다"는 문장들은 선전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기업의 성장은 곧 국가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국가의 성공은 곧 개인의 성공과 삶의 개선을 의미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 구조에서 개인은 대체로 “판단하는 존재”가 아니라 “실행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였다. 모방·복제·최적화·품질 개선 같은 영역에서는 한국의 집단적 실행력이 세계 최강이었다. 즉, 정답이 있는 시대에 한국은 정답을 가장 빠르게 따라가는 나라였고, 이 전략은 절대적으로 유효했다.

문제는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2. 기준이 사라진 현재: 정답 없는 시대가 노출한 한국 대기업 구조의 취약성

오늘날의 글로벌 시장은 더 이상 기준을 제공하지 않는다. AI, 플랫폼, 콘텐츠, 클라우드, 신에너지, 바이오 등 어느 영역에서도 확정적 정답은 없다. 기술 패러다임은 매년 재편되고, 선도 기업조차 실험하며 실패한다. 소프트웨어 기반 경제는 선형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기본값이다.
정답이 사라진 순간, 과거의 한국식 성장 모델은 근본적으로 무력해진다.

이 시대는 판단·실험·위험 감수·반복 수정이 핵심 역량이다. 그러나 한국 대기업 내부는 여전히 보고 체계, 승인 절차, 책임 전가 관행, 리스크 회피 심리 같은 산업화 시대의 유산에 갇혀 있다.
정답이 사라진 시대에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 조직”은 가장 빠르게 뒤처진다.

대기업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나오기 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먼저 등장한다.
“선례가 있는가?”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나?”
“왜 지금 해야 하는가?”
“리스크는 누가 감당하나?”

과거에는 필요했던 이 질문들이 지금은 혁신의 목줄을 죄는 족쇄로 변한다. 책임이 개인에게 집중된 구조에서는 누구도 과감한 실험을 시도할 수 없다. 반대로 성공했을 때 공로는 조직 전체에 희석되기 때문에, 개인은 도전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조직 전체를 정체 상태로 몰아넣는다.

정답 없는 시대는 충성심 기반 조직이 가장 취약한 시대다. 충성심은 기준이 존재할 때만 효율적이고, 기준이 사라지면 오히려 판단 회피와 책임 회피로 변질된다.


3. 혁신의 외피를 두른 현재의 시도들: 왜 대기업의 변화는 실제 혁신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현재 대기업은 다양한 혁신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AI 연구소 설립, 신사업 TF 운영, 사내 벤처 지원, 외부 전문가 영입, 스타트업 투자 확대 등은 언뜻 보기에 과거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도들이 형식과 외관만 새롭고, 구조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사내벤처는 권한 없이 움직이고, 성공하더라도 다시 모회사 구조로 흡수된다. AI 투자는 기술 독립이 아니라 비용 절감 목적의 자동화 수준에서 머무른다. 신사업 TF는 KPIs와 결재 라인에 묶여 혁신적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새로운 프로젝트는 시작하기도 전에 정치적 조율과 부서 간 합의의 늪에 빠진다.
혁신은 “새로운 단어”를 도입하는 것으로 오지 않는다. 혁신은 구조가 바뀔 때만 발생한다.

정답 없는 시대의 혁신은 실패를 통한 학습, 작은 실험의 반복, 팀 단위의 권한 집중, 빠른 실행과 폐기가 핵심인데, 한국 대기업은 이 모든 요소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현재의 변화는 대부분 혁신의 흉내일 뿐 혁신의 본질이 아니다.


결론: 성장 모델의 만료—정답 없는 시대의 새로운 주역은 대기업이 아니다

한국 대기업의 성장 정체는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경쟁자가 강해서”도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성장 모델이 완전히 만료되었기 때문이다.
정답이 존재하던 시대에는 모방·속도·충성심이 최고의 무기였다. 그러나 정답이 사라진 시대에는 실험·유연성·책임 분산·창의적 판단이 핵심 역량이다. 대기업은 이 새로운 모델로 전환하기엔 너무 크고, 너무 위계적이며, 책임이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다.
이 구조에서는 어느 누구도 진짜 혁신을 일으킬 수 없다.

지금의 시대는 작은 조직, 1인 개발자, 인디 창업자들에게 훨씬 유리한 환경이다.
정답이 없기에, 기존 강자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빠르고 민첩한 시도, 모호함을 견디는 능력, 구조를 뒤집는 실험정신은 거대한 조직보다 작고 유연한 개인에게 훨씬 잘 맞는 옷이다.

정답 없는 시대는 정답을 가진 자가 아니라 정답을 만들어가는 자의 시대다.
그리고 이 역할은 더 이상 대기업이 아니라, 기준 없는 세계를 스스로 뚫고 나가는 개인들—바로 지금 새로운 길을 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모바일 시장의 갤럭시는 커피 프랜차이즈로 비유하면 이디야와 같다
스타벅스는 애플이고, 메가커피-컴포즈는 중국폰

어쩌다 안드로이드 시대의 승자는 스스로의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가

개요

삼성 스마트폰이 한때 세계 시장을 장악했던 핵심 원동력은 안드로이드의 빠른 채택과 제조 역량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 선점 효과가 사라지고, 기술적 차별점·브랜드 정체성·시장 전략 모두에서 구조적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중국 스마트폰의 기술적 평준화, 비중국 제조업의 재진입 가능성, 브랜드 경험 경쟁의 심화는 갤럭시의 고가 전략을 더욱 흔들고 있다. 반도체 중심 구조가 강화되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 삼성은 B2C 스마트폰 사업의 장기 지속 가능성 자체를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다가서고 있다. 갤럭시의 위기는 단발성 ‘부진’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핵심 동력을 상실한 뒤 구조적으로 축적된 결과다.


1. 한때의 선점 효과는 사라졌지만, 아무도 그 부재를 설명하지 않는다

삼성 스마트폰이 세계 시장 정상에 올랐던 시기를 떠올려 보면 이유는 단순하다. 스마트폰 대중화 초기에 안드로이드를 가장 빠르고 과감하게 받아들였고, 다양한 라인업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스마트폰을 사려면 일단 갤럭시를 본다”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운영체제 선택의 자유를 원하는 이용자에게 갤럭시는 사실상 기본값이었다. 이 초기의 속도와 타이밍이 갤럭시의 최대 자산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장은 완전히 다르다. 안드로이드를 채택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런 차별성이 되지 않는다. 각국 제조사들이 모두 같은 운영체제를 쓰고, 비슷한 칩셋과 패널을 조합해 제품을 내놓는다. 초기에는 “안드로이드 = 갤럭시”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상징성도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국내 담론에서 갤럭시를 이야기할 때, 한때의 선점 효과가 이미 소멸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공백을 무엇으로 채우지 못했다는 사실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신제품 발표는 해마다 비슷한 풍경을 반복한다. 카메라가 조금 나아지고, 칩셋 숫자가 바뀌고, 인공지능 기능이 붙지만, 그 변화가 “갤럭시만의 이유”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예전처럼 ‘남들보다 먼저 안드로이드를 잘 쓴다’는 명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시장과 언론은 여전히 갤럭시를 예전의 위상으로 취급하는 척한다. 문제는 이 간극을 누구도 정면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 브랜드의 핵심 엔진이 수명을 다했음에도, 그 사실 자체가 분석의 출발점이 되지 않는다.


2. 중국 탓 서사에 가려진 구조적 열세

갤럭시의 어려움을 다룰 때 국내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설명은 “중국 업체의 공세”다. 값싼 중저가 제품이 쏟아지고, 신흥국 시장을 중심으로 점유율을 잠식한다는 이야기는 틀리지 않다. 하지만 이 설명만 반복하면 더 중요한 사실이 묻힌다. 삼성의 플래그십조차 이제 중국의 중‧저가 제품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불편한 현실이다.

많은 이용자들이 체감하듯, 지금의 중국산 스마트폰은 예전처럼 조악한 모조품이 아니다. 충전 속도, 배터리 용량, 디스플레이, 카메라 성능 등 여러 항목에서 상위권에 올라와 있다. 그 와중에 가격은 여전히 낮다. 이런 제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을 때, 고가 갤럭시 모델이 ‘현저히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기능이 비슷하면 남는 것은 가격과 신뢰인데, 가격에서는 밀리고, 신뢰는 중국이라는 제조국 이슈에 기대어 유지되는 구조다.

더 큰 문제는, 이 신뢰마저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중국 스마트폰에 대한 거부감은 주로 보안 우려, 이른바 ‘백도어’ 논란에서 비롯됐다. 만약 중국이 아닌 국가에서, 유사한 가격대에 비슷한 성능을 갖춘 제품이 본격적으로 다시 등장한다면, 갤럭시가 가진 마지막 방어막조차 약해진다. “중국은 꺼려지니 그 대신 삼성”이라는 선택 구조가 깨지는 순간, 고가 정책을 유지해 온 갤럭시의 위치는 훨씬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여전히 위기를 외부 탓, 특정 국가 탓으로만 설명하며, 자기 제품이 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지에 대한 구조적 질문은 충분히 던지지 않는다.


3. 전략적 축소와 철수의 가능성은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성장 여지가 줄어드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교체 주기는 길어졌고, 제품 간 기능 차이는 줄어들었다. 이 상황에서 기업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뻔하다. 수익성이 낮은 사업을 줄이고, 강점을 가진 분야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다. 삼성의 경우 그 강점은 누구나 알다시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다. 메모리와 파운드리, 첨단 공정과 부품 공급망에서 삼성이 갖는 위상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삼성이 스마트폰을 지금과 같은 규모로 계속 쥐고 있을 이유가 앞으로 10년 동안 과연 존재하는가. 수익성과 성장성이 떨어지는 B2C 모바일 기기 사업을 언제까지 “국가 대표 사업”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유지해야 하는가. 어느 시점에서는 플래그십 일부 라인만 상징적으로 남기고, 전체 사업 규모를 줄이거나, 전략적 파트너십과 ODM 구조로 전환하는 선택이 논리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좀처럼 공론장에 올라오지 않는다. 스마트폰 사업의 축소나 철수는 곧 ‘국가적 패배’라는 감정적 프레임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산업 전략 차원의 토론은 봉쇄되고, 현실적인 선택지를 검토하는 대신, 매년 비슷한 제품을 비슷한 방식으로 내놓는 관성이 유지된다. 이미 오래전에 시장의 핵심 동력을 잃었음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뒤로 미루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4. 브랜드 정체성 부재와 그 장기적 부작용

이 몰락의 과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지점 하나는 브랜드다. 기술과 가격이 비슷해질수록, 결국 소비자는 “이 제품을 쓰는 내가 어떤 사람처럼 보이는가”라는 감각적 기준으로 선택하게 된다. 애플은 이 영역에서 일찍부터 일관된 이미지를 쌓아 왔다. 아이폰 사용자는 단순히 특정 기능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미학·경험·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기기의 세부 스펙을 모르는 사람조차, 아이폰이 어떤 느낌의 브랜드인지는 직관적으로 안다.

반대로 갤럭시는 어떤 존재로 기억되는지 묻는 순간부터 어려워진다. 안드로이드 대표 기기라는 상징성은 흐려졌고, 가격만 놓고 보면 더 이상 ‘가성비’도 아니다. 디자인과 사용자 경험에서 일관된 철학이 드러나는지, 갤럭시를 쓰는 사람이 어떤 이미지를 갖는지, 명확히 정의된 것이 없다. 제품은 계속 나오지만, 브랜드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불투명하다.

이 정체성 부재는 단지 삼성 한 기업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산업 전반이 플랫폼과 브랜드, 경험 중심 경쟁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부품과 제조 역량에서 강점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소비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이미지로 엮어내지 못하면, 고부가가치 시장에서는 점점 밀릴 수밖에 없다. 갤럭시의 위기는 결국 “좋은 것을 잘 만드는 능력”과 “그것을 어떤 얼굴로 내세울지 결정하는 능력”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결론

한때 갤럭시는 안드로이드 시대의 상징이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공격적으로 스마트폰을 만들어 세계 1위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초기의 선점 효과와 제조 우위는 이미 상당 부분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메울 만한 새로운 동력은 등장하지 않았다. 고가 정책은 이어지지만, 중국을 포함한 경쟁사들과의 비교에서 뚜렷한 우위를 증명하지 못하고, 브랜드 정체성도 흐려진 상태다.

그럼에도 국내 담론은 여전히 “외부의 추격”과 “일시적 부진” 정도로 위기를 축소 해석한다. 스마트폰 사업을 언제까지, 어떤 형태로 유지할 것인지, 반도체와 부품 중심의 구조로 어느 정도까지 회귀해야 하는지, 갤럭시라는 이름이 앞으로도 소비자에게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질문은 충분히 던져지지 않는다. 이 공백 속에서, 한때의 대표 브랜드는 조용히 내리막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갤럭시의 미래를 비관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지만, 낙관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전제는 분명하다. 이미 잃어버린 핵심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의 전략이 그것을 대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 인식이 없으면, 새로운 길을 모색할 이유도, 용기도 생기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신제품이 아니라, “삼성은 앞으로 어떤 사업에 집중할 것인가, 갤럭시는 거기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둘러싼 솔직한 논의다. 그 질문을 피하는 한, 갤럭시의 몰락이라는 문장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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