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언론이 만든 담론, 그리고 우리가 놓친 것

학교폭력에 대한 사회적 분노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표면적으로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정의 실현의 욕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학교가 제공해야 할 사회적 역할의 실패에 대한 집단적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이 더 이상 안전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으며, 그 불안은 분노로 표출된다.

흥미로운 점은 학교폭력이 본격적으로 법률 영역으로 확대된 계기가 연예인들의 과거 폭력 전력 폭로였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선망하는 연예인이 학교폭력 전과가 있다는 사실을 언론이 기사화하면서 대중의 주목을 끌었고, 이는 급격한 사회적 담론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언론의 생존 전략이 기사에 투영된 것일 뿐이다. 최근의 보도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감행되는 폭로 행위는, 이미 그것이 주는 수익이 윤리적 비용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리는 연예인에게 어떤 정체성을 위탁하고는 한다. 그들이 완벽하기를, 도덕적이기를,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이상적 인간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연예인은 연예인일 뿐이다. 문제는 학교폭력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과거로 환원시키고, 그것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정작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왜 폭력을 생산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사라진다는 점이다.

1. 학교가 잃어버린 두 가지 역할

학교는 본질적으로 교육의 장이고, 생활의 장이다. 그러나 두 가지 역할 모두 실패하였다. 겉으로는 교육에 치중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학교가 제공한 것은 시험을 위한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학교가 그걸 바랐다기보다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사교육 시장을 보아라. 학부모들은 수능을 과거제처럼 사회 진입문으로 바라본다. 대학의 역할이 과연 등용문이어야 하는가?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그렇다.

점차 시대가 지나면서 사회보다 개인에게 부여된 선택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특히 학부모에게 부여된 선택의 폭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이전에는 정보가 한정되었다.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정보를 교류하거나 일부 고소득층이 전문가에게 위탁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로 양육에 대한 정보와 입시에 대한 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유튜브에는 "서울대 ○○ 엄마의 입시 전략" 류의 영상이 넘치고, 학부모 카페에는 새벽까지 입시 분석글이 올라온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어떻게 최고의 지위를 얻게 만들 수 있는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자신의 양육자로서의 가치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정보 전달의 효율성이 마케팅을 극대화시켰고, 시대 기류에 따르지 못한 학부모는 스스로 미달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매체들은 다양한 프레임으로 이를 강화한다. 자식이 불우한 환경에 놓이게 하는 건 바로 부모 탓이라는 식의, 그런 불구자식을 낳은 부모 탓이라는 식의 담론들이 만연해 있다.

그 결과 학부모에게 학교는 입시 컨설턴트와 같은 전문화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공간이 되었다. 동시에 생활 공간으로서의 가치 제공은 미묘하게 틀어진 방향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 아이가 왜 왕따가 되도록 방치했죠?" "우리 아이가 폭력을 당하는데 여태까지 조치를 안 하고 뭐했나요?" 그 모든 책임은 학교에게, 담임 교사에게 전가된다. 학교는 입시 역할에서는 가치를 부정당하면서, 생활 역할에서는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이 이중 잣대가 학교를 무력화시킨다.

사회가 주는 가치, 즉 학교에서 주는 가치가 축소되고 왜곡되면서, 학교라는 공간에 교육적인 역할도 사회적인 역할도 기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학교는 그저 가야만 하니 가는 곳으로 전락했다.

2. 의미를 잃은 공동체와 파벌화의 메커니즘

학교에서 의미를 찾기 점점 더 어려워졌고, 의미를 잃은 공동체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제 학생들에게 사회적 이익은 무엇인가? 집단 내에서 상위 위계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인가? 약자를 향한 무시와 괴롭힘이다. 의미를 잃은 공동체에서는 필연적으로 권력과 소외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모든 집단에는 원래 그럴듯한 위계가 존재했다. 그러나 반에서의 단합이 "개인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효율 중심의 사고가 확산되면서 이상한 양상을 띄게 되었다. 반에서의 단합은 단순히 집단 간의 경쟁으로써만 역할하는 게 아니었다. 반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획일화하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폭력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우리 반 친구를 건들면 가만 안 둔다" 식의 유대는 조금이나마 존재했다.

그러나 반이라는 가치가 상실되고, 결속이 약해지고, 개인화되면서 학생들은 그룹으로 쪼개지게 되었다. 나는 반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흐릿해졌다. 모두가 남이고 잠재적 경쟁 상대가 되었다. 그러면 어떤 파벌은 다른 파벌을 짓밟으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사회적 위치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대놓고 드러내서는 안 된다.

3. 법의 도입과 폭력의 비가시화

법률 체계를 학교에 도입하도록 장려됨으로써 보이는 학교 폭력은 줄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성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무시를 만들어냈다. 직접적인 괴롭힘보다 무서운 게 이 소외다. 애초에 교류라는 것이 성립되는 기회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물리적 폭력은 법으로 막을 수 있지만, 침묵과 무관심은 막을 수 없다. 법적 처벌을 피하기 위해 폭력은 더욱 교묘해지고, 더욱 보이지 않게 작동한다.

소외된 학생은 자책한다. 이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왜냐면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단순히 환경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통로에서 분노를 배출한다. 가해자를 생성한다. 외부 정보에서 가해자로 드러난 이들을 익명 속에서 공격한다. 그리고 사회 전체에 대한 증오를 갖게 된다. 잠재적인 불씨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라게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소외당한 아이가 인터넷에서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는 익명 공격자가 되고, 사회는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면서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고, 다음 세대가 또 같은 구조에 갇힌다. 이것이 바로 학교 폭력이 보이지 않게 확대되는 메커니즘이다.

결론: 우리가 재생산하는 구조

하지만 우리는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데 익숙하다. "걔네가 그렇게 눈치 없게 굴어서 그렇게 되겠지" 식의 사고는 각종 콘텐츠들을 보면 이미 만연하다. 학교에서는 드러내지 않는 것뿐이다. 모두 잠재적으로 합의한다. 그 결과 더욱 소외된 자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다들 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구조를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 구조 속에서 생존을 담보하기 위해. 생존은 구조에서 도망간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구조 속에서 싸워서 승리해야만 쟁취할 수 있다. 이것이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학교폭력 담론은 개인의 과거를 심판하는 데 집중하지만, 정작 그 폭력을 생산하는 구조는 여전히 작동 중이다. 학부모의 불안, 학교의 무력화, 공동체의 해체, 법의 역설, 소외된 자의 분노. 이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가는 동안,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같은 교실을 물려주고 있다. 보이지 않는 교실에서 자라는 불씨를, 우리는 여전히 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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