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떼쓴다’는 말이 지워버리는 것들

동덕여대 사태를 두고 바깥에서 가장 쉽게 꺼내 드는 말이 “그래봤자 떼쓰는 거다”라는 식의 표현이다. 이 한마디는 사건의 맥락을 통째로 잘라내고, 학생들을 하나의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는 미성숙한 집단으로 위치시킨다. 하지만 조금만 구조를 들여다보면, 이번 갈등은 단순한 감정 과잉이 아니라 대학의 존립 방식, 여대의 정체성, 그리고 의사결정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문제들이 겹쳐진 지점에서 터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학교가 재정 위기와 학령인구 감소를 이유로 공학 전환을 논의하는 순간, 학생들은 “학교가 우리를 하나의 이해당사자로 인정하는가, 아니면 통계상의 숫자로만 다루는가”라는 질문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여대에서 여학생으로 살아가는 몇 년의 경험은 단순히 ‘수업 듣는 시간’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형성되느냐에 따라 정체성과 관계망, 자기 인식 전체를 바꾸는 시기다. 그런 공간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논의가 책상 위에 올라왔을 때, 그 공간을 현재 사용 중인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위기 상황이다. 그 위기감에서 나오는 저항을 “떼쓴다”라는 말로 축소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이 싸우고 있던 대상—학교의 일방성, 불투명한 절차, 그리고 여대라는 공간의 의미—를 같이 지워버린다. 결국 이 표현이 날카롭게 보이기는커녕, 정작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쪽이 누구인지 드러내는 거울에 가깝다.

2. 충분히 촉발될 만한 동기, 그리고 소진되어가는 사람들

지난해 동덕여대 사태가 발발했던 때에는 촉발 동기가 충분히, 아니 과도할 정도로 쌓여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공학 전환 논의가 밖으로 알려졌을 때, 그것은 “갑자기 발작적으로 튀어나온 감정”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된 불신 위에 올라탄 마지막 불꽃에 가까웠다. 2025년 12월 3일 동덕여대는 2029년 이후 공학으로 전환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학교 측은 공론화라는 이름으로 위원회를 만들고, 숙의기구 토론·타운홀 미팅·온라인 설문조사를 거쳤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가장 큰 영향을 받고 수적으로도 가장 많은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의견 반영 비율이 교수·직원·동문과 1:1:1:1로 맞춰졌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메시지다. “너희가 제일 많이 겪겠지만, 의사결정의 무게는 똑같이 나눌 거야”라는 식의 태도는 형식적으로는 균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큰 이해당사자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희석시키는 구조다. 이런 구조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아무리 말해도 결국 위에서 정한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학습된 무력감에 빠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지난해 11월 점거·시위로 갈등이 폭발한 이후, 올해 공론화 절차와 학교 측 결정 발표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긴장을 반복해서 겪어야 했다. 이것은 해마다 다른 국면으로 이어지며 공동체의 체력을 지속적으로 소모시킨 과정이다. 그리고 지금, 공학 전환 발표가 나온 이 시점에서 학생들은 아마 복합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분명히 싸웠고, 일정 부분 논의를 지연시키고, 학교에 비용과 부담을 안겼지만, 최종 결과가 크게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 감각. “우리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허탈함과, 그래도 싸웠기 때문에 드러난 진실들이 있다는 미묘한 위안을 동시에 느끼면서, 더 싸울 힘은 남지 않은 상태로 조용히 흩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건 패배라기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 다른 층위—기억, 기록, 서사—로 이동하는 순간에 가깝다.

3. 여론과 이미지 손상, 비용은 누가 치르는가

갈등이 장기화되고 언론 보도가 반복되는 동안 동덕여대라는 이름에는 이미 하나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공학 전환 둘러싸고 시끄러운 학교’, ‘시위와 고소·고발로 뉴스에 오르내린 학교’라는 낙인은, 실제 그 안에서 조용히 공부하고 살아가던 개별 학생들에게도 그대로 따라붙는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이름은 여전히 사람의 능력과 인상을 대충 재단하는 도구로 쓰인다. 그런 사회에서 특정 학교가 사회적 논쟁의 장으로 소환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세금이 추가로 붙는 것과 같다. 취업 자리에서, 네임카드를 꺼내는 자리에서, 자소서를 쓰는 순간마다 “아, 거기 그 학교?”라는 반응이 덧붙을 가능성을 떠안게 된다. 문제는 이 이미지 손상의 비용을 실제로 치르는 쪽이 누구냐는 점이다. 공학 전환을 밀어붙인 재단 이사회도, 의사결정의 최종 버튼을 누른 사람들도, 여론을 자극적인 제목으로 소비한 언론도 아니다. 비용은 언제나 가장 약한 위치의 개별 학생들에게 먼저 떨어진다. 여론은 이 점에서 잔인하다. 사건의 구조는 복잡하게 움직이지만, 보도 방식은 단순하고 감정적이며, 검색 기록과 포털의 알고리즘은 이 이미지를 오랫동안 저장한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기사와 댓글, 짧게 편집된 클립들은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가”보다 “어떤 장면이 더 자극적이었는가”를 기준으로 확산된다. 그 결과로 남는 것은 학교라는 조직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아니라, 학생 개인에 대한 모호한 편견이다. 구조적 의사결정의 책임은 나눠지고 희미해지지만, 낙인의 무게는 구체적인 개인의 어깨 위에만 얹힌다.

4. 여대 공동체의 의미를 페미니즘 프레임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이유

이 사건을 두고 외부에서 가장 손쉽게 가져오는 프레임 중 하나는 “또 페미니즘이다”, 혹은 “여대라서 저러는 거다”라는 식의 단순화이다. 하지만 여대라는 공간을 단순히 ‘페미니즘 진영의 전초기지’로만 이해하는 것은 현실을 심각하게 축소하는 태도다. 여대가 지닌 의미는 물론 젠더 정치와 얽혀 있지만, 그것을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많은 여성들에게 여대는, 일상적인 남성 중심 문법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들의 언어와 기준으로 관계를 맺고 성장하는 장소다. 수업에서 발표를 하든, 동아리에서 활동을 하든, 학생회에서 의견을 내든, 이 모든 공간에서 ‘남자들의 반응을 먼저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심리적 자산이다. 그 안에서 형성되는 동료 의식, 롤모델, 연대 감각은 반드시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해야만 생기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쌓이는 어떤 분위기와 공기 같은 것에 가깝다. 공학 전환이 곧 악이고, 여대 유지만이 선이라는 이분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대가 사라지거나 형태를 크게 바꾸는 논의는 단순히 입시 구조와 재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지점을 무시한 채 사건 전체를 “페미니즘 갈등”이라는 프레임에 던져넣으면, 실제로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세밀한 경험과 상실이 전부 지워진다. 그리고 그 지워진 자리에는 언제나 외부의 이념 싸움만이 크게 자리 잡는다.

5. 무력감 이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어느 시점이 되면, 이번 사태에 직접 몸을 던졌던 사람들 상당수는 아마 조용히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다른 삶의 국면으로 이동할 것이다. 학교는 시간이 지나면 공학 전환을 기정사실화하고, 새로운 홍보 문구와 브랜드 전략을 짤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노도, 슬픔도, 저항도 차츰 잦아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무력감 이후에 무엇이 남느냐가 진짜 중요한 지점이다. 만약 이 사건이 “괜히 떠들어봤자 윗선이 정한 결론은 안 바뀐다”는 냉소만 남기고 끝난다면, 그것은 하나의 대학 사건을 넘어 다음 세대의 정치적 상상력 자체를 깎아먹는 결과로 이어진다. 반대로, 비록 원하는 결론을 얻지 못했더라도, 그 과정에서 드러난 구조적 문제들—의견 반영 방식, 공론화 절차의 설계, 대학 재정의 투명성, 여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계속 이야기한다면, 이 경험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다음 변화를 준비하는 밑바닥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겼냐 졌냐”가 아니라,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현실을 이해하려는 시도와, 서로를 비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같은 약자의 위치에서 무엇을 공유할 수 있을지 찾는 움직임이다. 동덕여대의 공학 전환은 이제 하나의 정책 결정이자 행정 절차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교육, 젠더, 재정, 민주주의가 어떻게 엮여 돌아가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케이스 스터디가 되어버렸다.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느냐, 어떤 언어로 다시 말하느냐, 누구의 시각을 중심에 놓느냐는 앞으로 비슷한 갈등이 나타났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의 폭을 달리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지 안에는, 적어도 누군가의 경험과 문제 제기를 가볍게 치부하는 표현들은 더 이상 자리 잡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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