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을 바꿨을 뿐이다.

착취라는 단어가 낡은 것이 된 자리에 포트폴리오가 들어왔다. 지주와 소작농의 언어는 퇴장했고, 파이프라인과 패시브 인컴의 언어가 등장했다. 달라진 것은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를 정당화하는 방식이다. 오늘의 계급은 착취하지 않는다. 설계한다. 그리고 설계한 사람은 존경받는다.

이 전환이 결정적이다. 도덕적 분노가 붙을 자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뺏는 자에게는 분노할 수 있지만 잘 설계한 자에게는 분노하기 어렵다. 오히려 배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비판이 욕망으로 전환되는 순간, 구조는 안전해진다.

신화는 그렇게 작동한다. 성공한 소수를 전시하고, 실패한 다수를 지운다. 전시된 소수는 콘텐츠가 되고 강연이 되고 책이 된다. 그들의 서사는 항상 개인의 통찰과 노력으로 쓰인다. 종잣돈은 각주에도 없고, 타이밍은 언급되지 않으며, 운은 겸손의 수사로만 등장한다. 신화는 반증되지 않는다. 성공이 계속 갱신되기 때문이다. 실패는 조용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기득권 진입이 생존 목표가 된 사회에서, 그렇지 않은 삶은 두 가지 방식으로 처리된다. 비가시화되거나, 비아냥거려지거나. 비아냥은 잔인한 형식이다. 외면도 아니고 공감도 아닌, 인식하되 책임지지 않는 방식. 당사자들도 이 언어를 빌린다. 자신의 고통을 직접 말하는 대신 비틀어 말한다. 자조가 문화가 되면 연대는 불가능해진다. 같은 처지라는 인식이 공동의 분노 대신 공동의 조롱으로 귀결된다.

자신의 가치를 찾지 못한 사람은 외부에서 흡수한다. 숏폼이 서사를 제공한다. 빠르고 강렬하고 반복적으로. 생각할 틈 없이 적이 지정된다. 정부, 이민자, 다른 성별, 다른 세대. 방향은 매번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분노는 횡적으로 흩어지고 수직적 질서는 건드려지지 않는다. 공감이란 이렇게 작동한다. 비판적 사유를 대체하면서, 구조 안으로 조용히 편입시키면서. 나는 그들보다 낫다는 감각이 굴레를 견디게 한다. 그 감각을 구조가 친절하게 제공한다.

조용히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자살보도 준칙. 숫자는 오르는데 언어는 줄었다. 고통은 집단의 것이 되지 못하고 각자의 내면에서 처리된다. 이따금 특별한 죽음만이 뉴스가 된다. 그 특별함의 기준은 생전의 지위다. 높은 곳에 있던 사람의 추락만이 서사가 된다. 그 서사조차 신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소비된다. 저 자리까지 간 사람도 버티지 못했다는 비극이 아니라, 저 자리가 그만큼 치열한 곳이라는 증거로. 죽음이 계급 서사의 부품이 된다. 나머지는 통계가 된다. 통계는 슬프지 않다.

자신은 죽어도 쓸모없다는 의식. 이것을 개인의 병리라고 부르는 것은 틀렸다. 구조가 생산하는 감각이다. 쓸모의 기준이 유통 가능성일 때, 유통되지 못하는 삶은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

쓸모. 이 사회가 가장 자주 묻는 것이 그것이다. 수익화할 수 있느냐, 콘텐츠가 될 수 있느냐, 시장에서 값이 매겨지느냐. 통찰도 유통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비판도 브랜딩되지 않으면 허공에 흩어진다. 구조를 꿰뚫어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시선을 팔아야 한다. 팔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한다. 인정받지 못하면 비가시화된다.

구조를 비판하는 사람이 그 구조에 의해 지워지는 것.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항을 유통시키지 않음으로써 저항이 저항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이 체제의 가장 정교한 부분이다.

계급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부러워하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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