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페이크는 어떻게 학생들에게 스며드는가: 성·관계 공간의 부재
성을 담아둘 그릇이 사라진 사회, 기술의 속도보다 뒤처진 인간의 미성숙
외부 젠더 프레임, 포르노 중심의 학습, 고립된 청소년기, 관계의 단절이 낳은 총체적 구조
0. 서론: 딥페이크 범죄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공간의 부재’ 문제다
한국에서 딥페이크 범죄가 빠르게 증가하는 현상을 두고, 언론과 댓글, 커뮤니티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남성의 문제”, “기술의 문제”, “10대 남학생의 일탈” 같은 설명이 가장 먼저 소환된다. 이런 설명은 분노를 표현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왜 이 현상이 이 정도 속도로, 이 정도 규모로,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기술이 갑자기 인간을 타락시킨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인간이 성을 다루고 관계를 구성할 공간을 사회적으로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술만 먼저 도착해버린 결과다. 욕망을 놓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공간, 관계를 실제로 시도하고 실패해도 괜찮은 공간, 동의와 거절을 연습해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비어 있는 사회에서, 이미지 생성과 합성 기술은 너무 쉽고 싸고 강력해졌다.
한국의 딥페이크 문제는 성욕의 일탈이 아니라, 성적 행위의 의미를 이해할 경험적 토대와 사회적 공간 자체가 허약한 구조 위에 기술이 얹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토대의 빈약함, 즉 성과 관계를 안전하게 다뤄볼 공간의 부재가 만들어낸 구조다.
1. 한국은 성을 경험하고 이야기할 공적 공간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
금기 → 공백 → 외부 이론 수입 → 프레임의 과잉 적용
한국 사회에서 성담론은 서서히 발전해온 적이 거의 없다. 단절과 도약만 있었다. 유교적 규범 아래에서 성은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었고, 학교 교육은 성을 “임신·위생·예방”의 기능적 문제로만 다뤘다. 가정 안에서도 성은 자연스럽게 오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능한 한 피해야 하는 주제였다. 청소년이 자신의 욕구를 입 밖으로 꺼내고, 그것을 둘러싼 부끄러움과 호기심을 누구와 함께 안전하게 다뤄볼 공간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이 사회는 오랜 시간 동안 성에 대해 사회적 공간을 축적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미뤄왔다. 성을 함께 생각하고 말해볼 장(場)을 만드는 대신 피했고, 피하는 대신 금기로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사회는 빠르게 현대화되었고,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성적 이미지와 정보는 엄청난 양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그 이미지들을 해석하고 소화해볼 공적·사적 공간은 거의 늘지 않았다.
서구 사회에서는 수십 년에 걸쳐 성교육, 젠더 연구, 관계학, 인권 담론이 쌓였고, 그 과정에서 학교·커뮤니티·상담실·미디어 등 다양한 층위에서 성을 논의하고 실험해보는 공간들이 만들어졌다. 한국은 그 축적 과정을 대부분 건너뛴 채, 결과물로 나온 이론과 구호만을 가져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영미권 젠더 이론의 수입이다.
문제는 이 이론들이 자라난 역사적 맥락과 철학적 토대, 그 이론을 둘러싼 실제 논쟁의 **장(場)**은 거의 사라지고, 감정적으로 자극적인 문장만 남았다는 점이다. 성은 권력이다,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위험하다. 이런 문장들이, 이를 풀어놓고 검증해볼 공론의 공간 없이 유통되었다. 한국은 이 프레임을 비판하거나 변형할 자기 경험의 공간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론들은 거의 그대로 통과했다. 성을 권력의 언어로만 배치하는 순간, 성을 관계와 경험의 공간으로 구성해볼 여지는 줄어든다.
그 결과 지금 한국 사회의 성담론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외부 개념들, 서로를 직접 마주할 공간이 없는 남녀, 화해 불가능한 젠더 갈등, 그리고 성을 이야기하기만 하면 곧바로 적대와 비난으로 흘러가는 구조로 채워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딥페이크 같은 기술적 문제를 “왜 이런 행동이 가능해졌는가”라는 질문의 차원에서 다루기 어렵다. 기술만 보이고, 그 기술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사회적·정서적 공간의 모양은 보이지 않는다.
2. 포르노가 성교육을 대체한 사회: 관계의 공간은 사라지고 자극만 남았다
경험 이전의 자극, 동의 이전의 시각 소비, 관계 이전의 대상화
한국의 성학습 구조는 세계적으로 보아도 삐뚤어진 편에 속한다. 공교육 안에는 성교육이라는 형식이 분명 존재한다. 학교에서 정해진 시기에 성교육을 하고, 예방 교육도 한다. 하지만 학생들이 그 내용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자기 삶과 연결해 이해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시험과 입시가 삶의 중심에 자리 잡은 교육 구조 속에서 성교육은 “점수와 무관한 시간”으로 취급되기 쉽고, 교실은 삶의 문제를 천천히 논의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험에 필요 없는 이야기를 빨리 흘려보내는 공간이 된다.
실제로 청소년의 시간과 에너지를 거의 전부 점유하고 있는 것은 수능 중심의 교육 모델이다. 이 모델 안에서 연애는 “하지 말라”는 금기까지는 아니라 해도, 경쟁 환경에서는 자연스럽게 억제되는 것으로 배운다. 부모 세대는 “대학 가서 연애해라”라고 말하면서, 그때까지의 욕구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공간도, 장면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 괴이한 공백 속에서 성에 대한 욕구와 호기심은 공식적인 교육 공간으로 흘러갈 수 없게 막혀 있다.
그러나 욕구는 존재하고, 인터넷은 항상 열려 있다. 현실에서 서로를 탐색하고 실수하면서 배우는 연애나 관계는 경쟁과 시간 압박 속에서 뒤로 밀린다. 청소년이 또래와 어색하게 대화하고, 서툴게 데이트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현실의 관계 공간은 축소된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대부분 포르노와 각종 성적 콘텐츠다. 누구도 포르노를 대놓고 권장하지 않지만, 다른 통로와 공간이 거의 제공되지 않는 구조 안에서 사실상 그 역할을 대체할 무엇도 등장하지 못한다. “안 보는 게 좋다”는 말 외에는 다른 선택지를 제시하지 못한 채, 청소년을 혼자 화면 앞에 남겨두는 상황에 가깝다.
포르노는 관계를 가르치는 장르가 아니다. 포르노는 상대의 감정, 시간의 흐름, 동의와 망설임, 서툼과 웃음, 실패와 조율 같은 현실적 요소가 거의 없는 무(無)공간 위에, 성적 행위만 극대화된 자극으로 띄워놓는다. 성은 둘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이 아니라, 혼자 화면 앞에서 소비하는 이미지가 된다. 그 결과 많은 청소년은 성을 “누군가와 함께 겪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하는 행위”로 먼저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 틱톡,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의 대형 플랫폼이 “교류의 기본 환경”으로 깔리면서 상황은 또 다른 방식으로 비틀어진다. 오프라인 학교와 학원은 그대로 있지만, 학생들이 실제로 시간을 쓰고 정서를 교환하는 심리적·정서적 공간은 유튜브·SNS 같은 온라인 매체가 되어버렸다. 이 매체들은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는 장이라기보다, 짧고 자극적인 영상과 외모 중심 화면을 통해 사람을 소비하는 장이다. 알고리즘은 화려한 외모, 과장된 리액션, 성적 이미지, 극단적인 발언을 우선적으로 노출시킨다.
이 환경에서 남학생은 옆자리 동급생과 어색하게 대화해 볼 공간보다, 화면 속 여성 인플루언서와 포르노 배우, 걸그룹, BJ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공간에 더 오래 머문다. 여학생은 현실의 남자애들과 부대끼는 공간보다, 온라인에서 소비되는 남성성, 그리고 여성 커뮤니티와 페미니즘 콘텐츠 속에서 재현되는 남성의 얼굴을 통해 남성을 배운다. 현실에서 서툴게 부딪히며 서로를 배우는 공존의 공간은 줄어들고, 남녀는 서로를 각각의 이미지와 프레임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한국 사회의 남녀는 실제로 만나기도 전에 이미 서로에게 실망한 상태가 된다. 남성은 여성을 외모지상주의적으로 소비하는 공간에 더 오래 있고, 여성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남자들의 성욕은 결국 여성 혐오로 귀결된다”는 식의 모델을 비교적 손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남녀의 교류가 현실에서 줄어든 자리는 인터넷에서의 극단적인 말싸움으로 채워지고, 서로에 대한 이해 대신 감정적 분절만 심화된다. 이 분절이야말로 딥페이크와 같은 범죄가 “단지 이미지 장난”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배경이다.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경험이 없으니, 이미지 편집과 폭력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포르노와 플랫폼이 만드는 시선의 공간”이라면, AI는 그다음 단계, 즉 “소비하던 이미지를 직접 만들어보는 공간”을 열어준다. 예전에는 성적 이미지는 어디까지나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것을 골라 보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10대에게 이미지는 “생성하고 꾸미고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얼굴 합성 앱, 필터, 프로필 사진 보정, AI 그림 생성기 등은 특별한 해킹 기술이 아니라 휴대폰 몇 번 터치로 쓸 수 있는 기능이 되었다.
이미지를 “본다”에서 “만든다”로 넘어가는 이 감각의 변화는 중요하다. 포르노가 “사람을 이미지로 보는 방식”을 학습시켰다면, AI는 “이미지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이라는 감각을 강화한다. 이 두 가지가 결합하면, 사람은 점점 더 “존중해야 할 타인”이 아니라 “편집 가능한 소재”처럼 느껴지는 디지털 작업실의 공간 안에 놓이게 된다. 이 지점에서 소비와 장난, 장난과 범죄 사이의 경계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진다.
3.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관계의 성숙을 위한 공간은 제자리다
딥페이크는 욕망의 타락이 아니라, 욕망을 담아둘 공간을 잃은 사회의 산물
딥페이크 범죄를 “남성 문제”로 환원하는 설명은 말하는 사람의 분노를 표현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조를 이해하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술은 해마다 정교해지고, 이미지 생성·합성은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욕망과 관계를 다루는 사회적·정서적 공간은 그 속도를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청소년과 청년은 가정에서, 공교육에서, 온라인에서 서로 다른 메시지들을 뒤섞어 받아들인다. 가정에서는 “그런 건 나중에”라며 침묵하고, 학교에서는 예방과 금기 위주의 정보를 제공하며, 온라인에서는 포르노와 자극적인 콘텐츠가 욕망을 소비하는 법만 가르친다. 그 어디에서도 욕망과 관계를 천천히 풀어볼 안전한 공간은 마련되지 않는다.
AI 기반 이미지 생성 도구는 이런 공백 속에 자연스럽게 끼어든다. 이것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가 아니라, 처음에는 단순한 장난, 놀이, 프로필 사진, 밈 제작에 쓰이는 도구다. 중요한 건, 이 “놀이”가 이미 사람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문화 위에서, 타인과의 실재하는 만남이 없는 공간 안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AI 도구는 진입 장벽이 거의 없다. 코드를 짤 줄 알 필요도, 전문 소프트웨어를 배울 필요도 없다. 웹사이트나 앱에 사진 몇 장을 올리고, 버튼만 누르면 결과물이 나온다. 이 과정에서 “내가 뭔가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은 줄어든다. 그냥 다른 필터를 하나 더 씌우는 것에 가깝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오히려 “심각한 일을 하고 있다”는 감각은 흐려진다. 범죄에 가까운 행위도 평범한 디지털 작업 공간 속에서 처리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일부 10대에게는 다음과 같은 사고의 사다리가 형성된다.
어차피 포르노는 모두가 보고, 이미지는 원래 소비되는 것이고,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은 다 캡처되고 돌아다닌다. 친구들과도, 어른들과도 이를 검증해볼 현실의 대화 공간은 없다.
AI로 얼굴을 합성하는 건 처음에는 유명 연예인이나 가상의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친구 얼굴로 한번 해볼까?”, “익명 커뮤니티에 올리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이어진다. 이 순간부터는 더 이상 단순한 이미지 장난이 아니라, 구체적인 범죄 행위가 된다. 그런데 이 경계가 이들에게는 도덕적 단절이 아니라, 같은 온라인 공간 안에서의 기술적 연속선 위에 있다.
다시 말해, 딥페이크 범죄는 “성욕이 이전 세대보다 유난히 타락해서”가 아니라, 욕망을 다루고 서로를 만날 건강한 공간이 부재한 사회에서 “이미지를 마음대로 편집할 수 있는 도구”가 너무 빠르게 보급되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욕구와 관계를 말로 조율하고 몸으로 겪어볼 공간이 없는 대신, 사람을 이미지로 보는 법과 이미지를 다루는 기술만 먼저 배운 결과다.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욕구를 드러내고, 협상하고,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자리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욕구가 비틀린 통로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딥페이크는 그 비틀린 통로 중 하나일 뿐이다. 침묵은 도덕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욕망을 올려놓을 수 있는 **장(場)**을 없애버리면, 욕망은 더 깊은 음지의 공간으로 숨어버린다. 숨어버린 욕망은 책임과 조율을 배우지 못한 채 기술과 결합해, 훨씬 더 파괴적이고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다.
딥페이크가 지금 이 사회에서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포르노가 “사람을 이미지로 만드는 공간”을 제공했다면, AI는 “그 이미지를 누구나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는 작업 공간”을 준다. 그러나 그 사이에 있어야 할 “욕망과 관계를 조율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할 수 있는 현실의 공간”은 여전히 없다. 법과 규제만으로는 이 흐름을 끊어낼 수 없다. 욕망을 담아둘 건강한 공간 자체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4. 한국 사회는 왜 성을 담아둘 공간을 잃었는가
금기 — 자극 — 외부 프레임, 이 세 가지 조합이 만든 ‘공간 상실의 사회’
조금 더 넓게 정리하면, 한국의 성담론 문제는 과거의 금기, 현재의 자극, 외부에서 가져온 프레임이라는 세 가지 축이 뒤엉켜 만들어낸 결과다.
과거의 금기는 성을 공적 언어에서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성을 다룰 공적 공간도 함께 지워버렸다. 욕구는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고 함께 생각해 볼 공간은 없었다. 현재의 자극은 인터넷과 플랫폼을 통해 통제되지 않은 형태로 쏟아졌다. 조심스럽게 익숙해지는 대신, 강한 이미지가 한 번에 몰려들었다. 외부 프레임은 이 혼란을 설명하는 대신, 새로운 적대의 언어를 퍼뜨렸다. 성은 권력의 장,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 욕망은 문제 그 자체라는 식의 시각이 현실 관계의 구체적인 공간을 대체했다.
이 세 가지가 겹치는 지점에서 성은 말하기 어려운 것일 뿐만 아니라, 함께 다뤄볼 공간 자체가 부족한 것이 된다. 성에 대해 입을 열면 비난이 따라오고, 성에 대한 생각을 꺼내는 순간 정치적 논쟁의 전장이 된다. 욕구를 인정하면 가해자로 오해받고, 성을 가볍게 말하면 무책임하다고 욕먹고, 진지하게 말하면 “왜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느냐”는 시선을 받는다. 결국 남는 것은 침묵과 과장된 분노뿐이다. 대화와 실험, 학습과 회복이 일어날 공간은 갈수록 좁아진다.
이 공간적 빈곤 상태에서는 어떤 기술적 규제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법과 제도는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욕망이 흘러가는 통로와 공간의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기술은 계속 정교해지고, 범죄는 더 은밀해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더 오해하게 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성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할 가장 기초적인 능력, 즉 “함께 머무르고 말해볼 수 있는 공간”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다.
결론: 지금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공간 만들기’다
성적 공간을 만든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
여기까지가 진단이라면, 남는 질문은 하나다. “그래서 도대체 성을 담아둘 공간을 만든다는 게 뭐냐?” 추상적인 구호로 끝내면 이 글은 또 하나의 비판문에 그칠 뿐이다. 성적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거창한 이론이나 제도를 세우자는 말이 아니다. 이미 비어 있는 몇 가지 자리를 다시 채워보자는 제안에 가깝다.
우선, 관계의 공간이 필요하다. 성을 단지 위험하거나 권력 관계의 전장으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려면,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고, 서툴게 다가가고, 거절당하고, 난처해하고, 다시 시도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과정을 실제로 겪어볼 수 있는 물리적·정서적 공간이 있어야 한다. 호감을 어떻게 표현할지, 거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대의 불편함을 어떻게 눈치챌지, 이런 것들을 연습할 공간 자체가 거의 없다. 성을 둘러싼 많은 문제는 이 지점에서 이미 시작된다.
다음으로, 욕구를 드러내고 조율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욕구를 없애야 할 것으로 취급하거나, 인정하는 순간 곧바로 가해자 취급을 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자기 욕망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 욕구 그 자체는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욕구를 어디까지, 어떻게 표현하고, 어느 지점에서 멈출 것인지에 대한 감각이다. 이를 편견 없이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욕망은 결국 혼자 처리해야 하는 어떤 것, 더구나 들키면 안 되는 것으로만 남는다. 그 상태에서 기술만 발달하면, 욕망은 더 쉬운 경로, 더 강한 자극 쪽으로만 흐르게 된다.
동의와 경계를 학습하는 공간도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에서 동의는 법률 조항처럼 말해지기 쉽고, “동의를 받았느냐, 아니냐”라는 이분법적 질문으로만 처리된다. 하지만 실제 관계에서 동의란, 상대의 감정 변화를 읽고, 망설임과 불편함을 감지하고, 중간에 멈출 줄 아는 감각에 가깝다. 이것은 단 한 번의 캠페인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래와 어른이 함께 사례를 나누고, 잘못된 경험을 털어놓고, 다시 어떻게 행동했어야 하는지 따져볼 수 있는 작은 공간들이 곳곳에 있어야 한다.
청소년기의 관계 경험을 어떻게 허용할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지금처럼 “수능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사람을 만나도 된다”는 식의 모델은 욕구를 포르노와 상상 속으로만 몰아넣는 역할을 한다. 연애를 장려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최소한 서로를 “동일한 인간”으로 경험해볼 수 있는 공존의 공간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 부분은 제도보다 분위기의 문제에 가깝고, 어른 세대가 자기 불안을 줄이는 데 실패할수록, 청소년은 더 왜곡된 방식으로 성을 학습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미디어와 담론의 공간 구성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지금의 기사와 논쟁은 성을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소비하게 만들 뿐, 이해의 폭을 넓히지 않는다. 딥페이크와 성범죄를 다룰 때, “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식의 자극적인 보도와 “남성 전체가 문제다”라는 식의 프레임만으로는 어떤 변화도 만들 수 없다. 그 대신, 왜 이런 행위가 특정 사회 조건에서 가능해졌는가, 어떤 구조적 공백이 사람들을 이런 선택으로 밀어 넣는가, 욕구와 관계를 둘러싼 공간의 부재가 어떤 식으로 범죄의 토양이 되는가를 설명하는 말과, 그런 논의를 담아낼 미디어의 공간 설계가 필요하다.
요약하자면, 성적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 성 = 위험
- 욕망 = 금기
- 친밀감 = 사치
라는 현재의 감각 구조를
- 성 = 관계의 공간
- 욕구 = 조율의 공간
- 친밀감 = 학습의 공간
이라는 다른 감각 구조로 조금씩 옮겨 놓는 작업이다. 이 공간을 정치가 대신 설계해줄 수 없고, 외국 이론이 가져다줄 수도 없다. 사회가 스스로 관계를 말하고, 욕구를 드러내고, 서로의 감정과 동의를 조율해볼 현실의 장소들을 다시 만들기 시작할 때, 비로소 조금씩 생성되는 것이다.
딥페이크를 단순히 “새로운 종류의 성범죄”로만 취급하는 한, 우리는 앞으로도 기술만 탓하고, 특정 집단만 욕하고, 똑같은 공포를 소비하게 될 것이다. 이 현상을 멈추고 싶다면, 기술보다 먼저 인간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복구해야 한다. 포르노가 사람을 이미지로 만든 공간을 제공했고, 플랫폼이 이미지를 소비하는 습관을 들이는 공간을 만들었으며, AI가 그 이미지를 누구나 마음대로 생성·조작할 수 있는 디지털 작업 공간을 열었다. 그 사이에 있어야 할 인간의 공간, 즉 서로를 실제로 마주하고 욕망과 관계를 조율해볼 자리들은 여전히 비어 있다.
딥페이크 시대의 진짜 출발점은, “이걸 단속하라”는 외침이 아니라,
“우리는 도대체 성과 욕망, 관계를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
라는 질문을 다시 꺼내는 일이다. 그 질문을 피하는 한, 이 문제는 형태만 바꿔 계속 돌아올 것이다.